카테고리 없음

[스크랩] 적천수 제명에 대한 해석

일통 2011. 3. 16. 11:58

적천수 제명에 대한 해석


1. 적천수 제명에 대한 해석

무릇 모든 책을 해설하고자 하면 그 제명부터 해석하는 것이 원칙이다. 왜냐하면 제목이 그 책의 핵심사상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중국과 우리나라의 적천수를 각 3~4권씩 구해서 보았지만 아직까지 적천수 제명에 대한 해석을 보지 못했다. 그러므로 일단 자전에 의거하여 적천수 세 글자를 해석해 보겠다.

적滴자는 명사로 물방울 또는 방울이고, 동사로 (빗방울 등이) 듣다, 물방울이 떨어지다, 한 방울씩 떨어지다(떨어뜨리다) 등의 의미가 있다. 천天은 하늘 천공 상제 만물의 주재자 자연의 이법 임금 천국 낙원 하루 낮 계절 기후 날씨 등이다. 수髓는 골수 뼛속 정수 진수 요점 핵심 등이다. 그리고 적천이라든가 천수라는 단어는 사전에서 찾아볼 수 없다.

그렇다면 적천수라는 세 글자를 조합하여 해석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하늘(또는 상제, 만물 주재자, 자연 이법)의 골수(또는 정수, 진수, 핵심)의 물방울을 떨어뜨리다’ ‘하늘의 골수를 물방울처럼 떨어뜨리다’ 또는 ‘하늘 골수의 물방울’ 등의 뜻으로 해석할 수 있겠다. 곧 이 적천수는 광대무변한 하늘의 이법 곧 천도의 골수 중에 한 물방울을 표현한 글에 불과하지만 또한 이 조그마한 한 물방울에 의거하여 광대무변한 천도의 골수의 원리를 추구해 들어갈 수 있다라는 뜻으로 풀이하고 싶다.


2. 제재와 신공 등은 하늘천자의 주석이다

삼원이나 만법의 조종(또는 근본), 제재와 신공 등은 같은 말이다. 삼원과 만법의 조종이 음이고 본체라면 제재와 신공은 양이고 작용이라 말할 수 있다. 음이나 본체는 고요하여 그 핵심을 파악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알 방도가 없으므로 움직이는 양 곧 작용을 의거하여 그 뜻을 파악하라는 것이다.

공자님께 제자가 묻기를 “죽음(死)이 무엇입니까?” 이에 대답하시기를 “삶을 알지 못하면 어찌 죽음을 알겠느냐?(不知生 焉知死)”라고 하셨다. 죽음이 이것이다라고 단정하여 말씀하지 않으셨다.

여름 한철만 사는 매미에게 봄과 가을을 설명하기가 어렵듯이 사람들도 생사의 양쪽 세계를 동시와 왔다가 갔다를 자재할 수 없기 때문에 죽음의 세계를 알기 어렵고 설령 안다고 할지라도 설명하기가 지극히 어렵다. 밤을 알려면 낮을 먼저 알아야 하듯이 죽음의 세계도 삶의 세계를 먼저 알아야 비로소 알 수 있다는 뜻이다.

공자님은 일의 선후를 밝히신 것이다. 이를 “삶의 세계도 알지 못하는데 어찌 죽음의 세계를 알겠느냐?”라고 해석하면 공자님을 생사를 모르는 범부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하늘이 두렵고, 성인이 두려우며, 성인의 말씀이 두렵다.”는 말씀이 있다. 그러므로 하늘도 해석하기가 어렵고 성인의 말씀도 또한 해석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그래서 적천수라는 제명도 해석하기 어려운 것이다.

적천수라는 제명의 하늘천자를 알면 적천수의 대의를 일목요연하고 명약관화하게 파악할 수 있겠지만 하늘천자의 의미를 모르기 때문에 적천수의 첫 장에서 그 각주를 공부하는 것이다. 그 하늘천자의 의미를 적천수의 첫머리에서 삼원이나 만법의 조종 제재와 신공 등의 표현으로 주석한 것이다. 적천수의 대의가 여기에서 온전히 다 드러났다고 해석할 수 있다. 이 이후의 글은 모두 삼원이나 만법의 조종 제재와 신공 등에 대한 주석에 불과할 따름이다.


3. 천도의 통달 또는 이해가 명리공부의 첫걸음이다

서자평 선생은 명리학계에서 하나의 기준이 되는 인물이다. 서자평 이전에는 사주를 연간을 중심으로 파악했고 서자평 이후로부터 사주를 일진을 중심으로 파악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서자평 이전에 명리학의 대가들은 엉터리로 사주를 파악했을까? 반드시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다.

적천수 4권 중에 1 2권을 통신론이라 하고 3 4권을 육친론이라 한다. 육친론은 그만두고 통신론의 원리에 입각하여 사주를 파악한다면 설령 일진이 아닌 연간을 중심으로 사주를 파악한다고 할지라도 크게 어긋나지는 않을 것이다. 더구나 서자평 이전의 대가들이 하늘의 원리 곧 천도에 달통했다면 굳이 사주팔자에 의거하지 않고서도 사람들의 명운을 명백하게 파악했을 것이다. 하물며 일간과 연간의 기준이 다르다고 명운을 파악하는데 무슨 차이나 장애가 있었겠는가.

그러므로 이 적천수를 공부함에 있어서 각론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총론이 중요한 것이다. 사람의 명운을 알려면 격국이나 청탁 등 세부사항도 공부해야 하겠지만 그보다 먼저 고요하고 깨끗한 마음을 닦는 공부를 하여 천도를 통달해야 할 것이다. 이 때문에 이 명리서의 이름을 적천수라 명명하고 또한 이 책의 수장에 천지인 삼재의 원리로 장엄한 것이다.


4. 천도天道와 지도地道

삼원이 만법의 근본임을 알고자 하면 먼저 제재와 신공을 살펴보아야 한다. 지원(곤원)이 천원(건원)의 덕과 합하여 만기가 닫히고 열리며 오기가 치우치고 온전하여 이로써 길흉을 단정하는 것이다.

천도와 지도의 핵심 사항을 위에서와 같이 간결하게 표현했다. 곤원 곧 지원인 땅의 지도에 건원 곧 제재와 신공의 건덕이 합하여 기가 열리고 닫히는 것이다.(坤元合德機緘通) 이 기를 본인은 만기라 해석했다. 이를 천기라 해도 졸고 추기라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런데 이 원문을 주석한 원주에 “하늘과 더불어 덕이 합하고 그 기함의 묘용을 감응하는 것이다.”(與天合德而感其機緘之妙)라고 해석함으로써 기함이 한 단어로 정착되었다. 이를 근거하여 서낙오 이후의 근대 학자들이 모두 기함통機緘通을 기함을 유통한다고 해석하고 있다.

곤원의 본체는 안정이 핵심이기 때문에 기가 닫혀 있는 것이(기함) 일상적이고 또 옳다. 그러나 곤원에 건원의 덕이 합하여 기가 열려서 유통하는 것은 건원의 묘용(또는 작용)일 것(기통)이다. 만일 기함을 한 단어로 고정시키고 곤원에 건원의 덕이 합하고 그 기함의 묘용을 감응한다고 하면 기가 닫히는 곤원의 기능은 어떻게 작용하는가?

기가 닫히는 것은 곤원의 고유기능이기 때문에 건원의 작용이 전혀 미치지 못하는 불가침의 성역인가? 만일 그렇다면 곤원에 건원의 덕이 합한 작용이 반쪽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곤원에 건원의 덕이 합하여 만기가 동시에 열리기도 하고 닫히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함을 한 단어로 고착시킨 원주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최소한 임철초 선생은 이와 같은 어리석음을 저지르지 않았다고 본다. 임씨 주석 중에 기함유통機緘流通을 ‘기함을 유통한다.’라고 해석할 수 있지만 ‘기를 봉함封緘하고 유통한다.’라고 해석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출처 : 역학동
글쓴이 : adaseju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