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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정운찬 - 총리 내정자

일통 2009. 9. 9. 13:19

정운찬 대학 교수, 총리 내정자

 

 

출생 1948년 2월 29일, 충남 공주시

소속 서울대학교 금융경제연구원, 원장

학력 프린스턴대학교 대학원 경제학 박사

경력 2009년 서울대학교 금융경제연구원 원장
        2002년 제23대 서울대학교 총장

 

 


양 력: 1948년  2월 29일

음/평: 1948년  1월 20일   남자


시 일 월 년

@ 甲 甲 戊

@ 申 寅 子


癸 壬 辛 庚 己 戊 丁 丙 乙   대운: 순행

亥 戌 酉 申 未 午 巳 辰 卯

81 71 61 51 41 31 21 11 1.12


대운 시작: 1세 12월 10일

현재 나이: 62 세 (09년 기축년)

현재 대운: 辛




양 력: 1948년  4월  8일

음/평: 1948년  2월 29일   남자


시 일 월 년

@ 癸 丙 戊

@ 亥 辰 子


乙 甲 癸 壬 辛 庚 己 戊 丁   대운: 순행

丑 子 亥 戌 酉 申 未 午 巳

89 79 69 59 49 39 29 19 9.4


대운 시작: 9세 4월 5일

현재 나이: 62 세 (09년 기축년)

현재 대운: 壬




"우리 집안에 3대째 정승이 끊겼으니, 자손으로서 부끄러운 일이 아닌가? 공부에 더욱 정진하여 자네 손으로 가문의 명예를 일으켜 세워야 하네."

정운찬 총리 후보자가 2007년 여름 대권 도전의사를 포기한 후 펴낸 자서전 <가슴으로 생각하라>에 나오는 구절이다. 어린 시절 아버지를 여의고 지독한 가난 속에 살았던 그는 고등학생 시절 공부를 그만두고 공장에서 일하기로 마음 먹는다. 그러나 삯바느질로 근근이 다섯 자녀를 키우는 어려운 살림 속에서도 항상 아이들에게 '자네'라고 호칭하며 존중해 온 어머니가 '공부 잘 하는 막내'에 대한 기대를 이렇게 드러내자 소년 정운찬은 다시금 공부에 열중한다.

고려, 조선시대 '정승'은 문무백관 중 최고의 직위. 총리직 권유를 수락함으로써 그는 어머니의 소원을 40여년이 지난 지금 풀어드리고 싶었던 것일까.

궁핍했던 어린 시절

 

정 후보자는 1946년 충남 공주시 탄천면 덕지리에서 태어났다. 전쟁이 일어나고 몇 달이 지나서야 그 사실을 알았을 만큼 외떨어진 산골이었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서울로 올라와 단칸방에서 새 삶을 시작한 일곱 식구는 지독하게 가난했다. 명절제삿날 빼고는 쌀밥을 구경조차 못했고, 주식은 미국에서 원조물자로 준 옥수수 가루를 넣고 끓인 죽이었다. 아버지마저 일찍 세상을 떠나자 어머니는 삯바느질로 가정을 꾸렸다.

그는 어린 시절 딸 부잣집이었던 숙부의 양자로 입적됐으나 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숙부가 세상을 떠나고 영장이 나오자 '부선망(父先亡) 독자', 즉 아버지를 여인 외동아들이라는 이유로 징집 연기를 받았다. 이후 1979년데 후반에 최종적으로 징집이 면제됐는데, 이 때문에 17대 대선 후보로 거론될 당시 야권으로부터 공격을 받기도 했다.

은인을 만나는 '운'

정 후보자는 금전적인 운은 없었지만 인생의 전환점마다 소중한 은인을 만났다는 점에서는 이름처럼 '운이 가득 찬' 사람이었다. 그 중에서도 대학 시절 사제 관계로 만난 조순 전 경제부총리는 그에게 정신적 아버지와도 같다.

고등학생 시절 청계천 헌책방에서 산 <국부론>을 영어로 읽었다는 뿌듯함에 서울대 경제학과에 진학했지만 수업이 기대에 미치지 못했던 그는 "조순을 만나 드디어 경제학을 발견했다"고 말했다. 그는 조 교수의 수업이 끝나면 칠판을 한 문장 한 문장 꼼꼼히 지워가며 가르침을 복기했다.


졸업 후 한국은행에 입사한 때도, 입사 후 1년 반 만에 미국 유학 길을 선택할 때도, 서울대에서 처음 실시한 교수 공채시험에 도전했을 때도, 심지어 청혼을 했다가 장인으로부터 거절당했을 때도 조 교수는 그를 확실하게 지원해 줬다.

서울대 총장 선거와 대권 도전

서울대 총장 시절의 정 후보자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지방균형 입학제 등 개혁적인 정책도 도입했으나 본고사 부활 등의 문제로 노무현 정부와 끊임없는 갈등을 겪었고, 이 때문에 '서울대 특권'을 지키려 한다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다.

그러나 총장을 지내면서 얻은 인지도와 뛰어난 학자로서의 이미지, 중도개혁 성향은 정치권의 끝없는 러브콜을 받는 요인이 됐다. 김대중 정부 출범 직후 한국은행 총재 제안을 받았으나 고사했고, 노무현 정부 때도 경제부총리, 국무총리 등의 물망에 올랐다.

 

특히 17대 대선 당시에는 범여권 제3후보로 거론되며 대선 출마와 신당 창당까지 고려하기도 했으나 결국 "내가 가장 잘 하는 일을 하겠다"며 평교수 자리로 돌아갔다.

계속된 정치권의 권유를 물리치면서도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장래희망을 '국회의원'이라고 당당히 말했던 그의 마음속에는 정치에 대한 갈망이 남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대선 후보로 거론될 당시 "평생 공부한 경제이론을 실물경제에 접목해 보고 싶은 욕구" "사람 사는 나라, 제대로 된 나라, 품격 높은 나라를 함께 만들고 싶은 욕구" "지금까지 사회로부터 받은 갖은 혜택을 돌려주고 싶다는 마음" 때문에 정치인의 꿈을 꿨다고 말했다. 총리직을 수락하던 순간까지 그 꿈이 식지 않고 남아 있었던 셈이다.

가족으론 부인 최선주(화가)씨 사이에 1남1녀가 있다.

 

 

 

 


정운찬(鄭雲燦, 1948년 2월 29일 ~ )은 대한민국의 대학교수, 경제학자이다.

 

충청남도 공주 출신으로 경기고등학교서울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 졸업 후 한국은행에 잠시 재직하다가 미국으로 유학하여 마이애미 대학교에서 석사,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78년에 모교인 서울대학교 경제학과 교수로 부임하여 현재 재직중이며, 제23대 서울대학교 총장을 지냈다.

 

한국은행 출신으로 중앙은행 독립을 주장하는 대표적 인사로 알려져 있으며, 주요 저서로는 '한국경제 아직도 멀었다.', '한국경제 죽어야 산다.', '금융개혁론', '거시 경제론', '화폐와 금융시장' 등이 있다. 2007년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에서 충청권 유력 후보로 이따금 거론되었지만, 지지율 답보로 결국 출마하지 않았다. 야구광으로 알려져 있는 그는 이후 프로 야구 라디오 중계방송에 해설자로 나오기도 했다.

 

2009년 9월 3일에 단행된 개각으로 제40대 국무총리로 지명되어 인준절차를 앞두고 있다.

 

전 임
이기준

제23대 서울대학교 총장
2002년
7월 20일 ~ 2006년 7월 19일

후 임
 이장무
 

 

 

 

 


정운찬 총리 후보자는 2007년 봄에 비하면 지금 사정이 훨씬 나아졌다. 당시 그는 러브콜(love call)에 빠졌으나 인기가 없는 열린우리당이었다. 대선후보가 되기도 쉽지 않았지만 만약 됐어도 이명박(MB)이나 박근혜에게 졌을 것이다. 그러면 그는 지금쯤 민주당이란 정글에서 타잔보다는 미아가 되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총리 발탁으로 지금은 한나라당의 차기 주자 후보로 거론된다. 만약 총리직을 인상 깊게 마치면 그에겐 여러 가능성이 열릴 수 있다. 우선 ‘박근혜 대항마’ 자리를 놓고 정몽준·이재오와 경쟁을 벌일 수 있다. 대항마가 되면 세력을 규합해 박근혜와 일전(一戰)을 벌이면 된다. 아니면 충청도 카드로 박근혜와 연대해 지분(持分)을 확보해도 된다.

 

정·부통령 개헌이라도 되면 더욱 그럴듯하다. 아니면 오세훈·김문수와 소장파 연대도 해볼 수 있다. 이런 일이 잘 풀리면 그에겐 2007년의 좌절(불출마)이 새옹지마가 된다. 여기까지만 보면 그는 역시 운이 좋은 것 같다.

어머니는 가난한 살림에 열한 번째 아기가 생기자 이를 지우려 독초를 먹었다. 정운찬은 그래도 태어났다. 아버지는 주역에 통달한 마을 어른에게 작명을 부탁했다고 한다. “사주에 운이 꽉 차 있구먼.” 운이 찼다 해서 운찬이라 했고 돌림자인 구름 운(雲)에 빛날 찬(燦)을 붙였다.

 

많은 운이 있었지만 첫째는 머리다. 그는 경기고·서울대에 이어 아이비리그 대학에서 박사를 받았다. 그는 성실하기도 했지만 탁월한 두뇌가 아니면 이런 성취는 불가능하다.

 

그는 MB처럼 가난했지만 가난의 또 다른 쌍둥이는 행운이었다. 학비나 진로의 고비마다 산신령이 나타나 길을 뚫어주었다. 학비를 도와준 독립운동가 멘토(mentor) 스코필드 박사, 경제학과로 이끌어준 고교 1년 선배 김근태(전 열린우리당 의장), 사회의식을 일깨워준 가정교사 선배 신영복(통혁당 사건 20년 복역, 현재 성공회대 교수), 미국 유학으로 인도한 조순 교수(전 경제부총리)가 산신령이었다.

정운찬은 “나의 생애는 이름 그대로 운이 가득 찼다”고 말하곤 한다. 그러나 그에게 행운의 행진은 더 이상 없을지 모른다. MB가 그를 총리로 발탁한 것이 마지막 행운으로 기록될 수도 있다.

 

이제부터 세인(世人)이 관심을 갖는 건 행운이 아니다. 그의 능력과 의지가 찍어내는 구체적인 성적표다. 차기 주자라는 말을 타려면 그는 마장(馬場)의 입장권을 사야 한다. 입장권은 꽤 비싸다.

입장권을 사기 위해 MB는 샐러리맨 신화와 청계천을 지불했다. 박근혜는 노무현 정권의 좌파 폭풍우 속에서 국가정체성을 지키고 탄핵 역풍으로 죽어가는 한나라당을 살려냈다. 오세훈은 의원 시절 깨끗한 선거풍토의 길을 닦았고 지금은 서울의 깨끗한 공기를 만들고 있다.

 

김문수는 젊은 날 부귀영화 대신 노동운동을 택했고 지금 경기도 CEO로 변신 중이다. 정몽준은 세계 최대의 조선소에다 월드컵 축구라는 흑자(黑子)의 대차대조표가 있다. 이재오는 가난 속에서 민주화 투쟁에 젊은 날을 바쳤고 MB정권 창출에 핵심적으로 기여했다.

정운찬의 희생과 실적은 무엇인가. 그는 서울대 총장으로 꽤 괜찮은 성적표를 남겼다. 그러나 정치의 세계는 관악산 자락의 교실과는 다르다. 강의실에는 신음이나 비명이 없지만 사회엔 있다. 경쟁이 두려운 약자들의 신음소리가 가득하다. 정운찬은 경제학자 중에서 케인스와 마셜을 특히 존경한다.

 

케인스는 정부와 경제학자들이 자본주의의 태생적 허점을 메워야 한다고 믿는다. 마셜은 케인스의 스승인데 경제학자들에게 ‘차가운 머리와 따뜻한 가슴’을 가지라고 충고한다. 정운찬은 경제학자이며 이제부터 그의 과제는 ‘경제학 실천’이 되어야 한다.

 

‘마담 총리’ ‘의전 총리’나 하려면 차라리 야구 해설이 더 사회에 기여하는 것이다. 그는 평생을 바쳤다는 경제학으로 약자의 신음소리를 줄여나갈 방책을 내놔야 한다. 그것이 최소한의 마장 입장권이다.

출처 : 사주명리(좋은사람 정모카페)
글쓴이 : 도무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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