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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백범 김구 선생님 사주

일통 2012. 10. 19. 11:16

1876711(해주) ~ 1949 626(향년 73). 본관은 안동. 아명(兒名)은 창암(昌巖), 본명은 창수(昌洙), (()

개명. 자는 연상(蓮上), 호는 연하(蓮下백범(白凡).

 

[백범일지]의 내용을 보면

 

일본군 장교를 때려 죽인 뒤 절에서 숨어 지내며, 관상·사주. 풍수 공부에 몰입하여 어느 날 자기 자신의 팔자를 보니 평생 빌어

먹을 팔자가 아닌가? 또한,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살펴보더라도 눈도, 귀도, 코도, 입도 거지라는 풀이가 나왔다.

그러자 더 이상 살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고 뒷산에 올라 소나무에 목을 매고 자살 하려고 했다. 받침대로 있던 돌멩이를 차버리려

고 하는 순간 불현듯 머리에 떠오른 글귀가 하나 있었으니 바로 관상불여심상(觀相不如心想)’이었다.

상호불여신호(相好不如身好) 신호불여심호(身好不如心好)’라는 마의상법(麻衣相法)에 적힌 글귀를 생각하고는 마음을 고쳐먹었

.

 

 

          [1876년생 남자]

 

 

    辛 己 丙 丙

    未 巳 申 子

 

83 73 63 53 43 33 23 13  3

乙 甲 癸 壬 辛 庚 己 戊 丁

巳 辰 卯 寅 丑 子 亥 戌 酉

..........................................................................................................................................................................

 

상관격이지만 시간에 식신 금이 투()하여 상관격이 식신격으로 변격이 되어 다소 성격의 형태를 띄고 있으나 투간한

용신인 식금이 월간의 정인 화에 의해 합거되어 패격이 됨.

다만 월지의 상관 금이 년지의 편재 수와 반합(半合) 하여 상관이 재로 변하는 것(化生爲財=상관이 合化하여서 재

가 됨)길한 징조.

 

그러나 용신충파(합거) 일사불성<用神沖破(合去) 一事不成>’이라.

 

식신 즉 하고자 하는 일들이 난관에 자주 막히고, 식신 즉 끼니를 잇기가 어려운 일을 자주 당하게 되며 식신 즉 남을 보

살피고 도와 주기가 어려울 수 있는 명조.

 

식신과 상관은 재운(財運)에 발복(發福)을 하며 상관이 재로 화()하고 있어, 관운(官運)에는 명예도 얻을 수 있음.

대운

년도

나이

내용

1887(戊子)

12

 

아버지가 집안에 세운 서당에서 한문과 한글을 익힘.

 

1891(辛卯)

16

 

정문재(鄭文哉)의 서당에서 당시(唐詩)대학을 공부하고 과문(科文) 등을 익힘.

1893(癸巳)

18

우리나라 마지막 과거인 경시(慶試)에 응시하기 위해 해주에 갔으나, 매관매직을 보고 과거를 포기하고 돌아와 풍수지리서· 관상학· 병서 등을 읽으며 훈장을 지냄.

1893(癸巳)

18

 

동학의 평등주의에 감화되어 입도한 뒤 포덕(布德)에 힘을 기울여 접주(接主)가 되었다.

1895(乙未)

20

 

남만주로 건너가 김이언(金利彦) 의병부대에 참여하여 일본군을 공격했으나 참패

1896(丙申)

21

명성황후(明成皇后)가 살해되자 충격을 받고 귀국하여 안악(安岳)으로 오는 도중 치하포(河浦)에서 일본군 중위 쓰치다[土田壤亮] 를 때려 죽인 뒤 집에서 은신 중 체포 됨.

1897(丁酉)

22

 

사형 확정되어 집행되기 직전 고종의 특사로 집행이 정지되었으나, 일본공사 하야시[林權助]의 압력으로 출옥하지 못함.

1898(戊戌)

23

탈옥하여 삼남 일대를 떠돌다 하동 쌍계사(雙溪寺)로 피신. 그 해 가을 공주 마곡사(麻谷寺)에서 승려가 됨. 서울을 거쳐 평양근교 대보산(大寶山) 영천암(靈泉庵)의 방주가 됨.

1899(己亥)

24

 

환속(還俗)을 함.

 

1903(癸卯)

28

 

기독교에 입교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애국계몽운동에 참여

 

1906(丙午)

31

 

종산 서명의숙(西明義塾)의 교원이 됨.

 

1910(庚戌)

35

안창호(安昌浩)가 주도하는 비밀애국계몽단체인 신민회(新民會)의 회원이 되어, 양기탁(梁起鐸)이 소집한 비밀회의에 황해도 대표로 참석.

1911(辛亥)

36

안악(安岳) 부호들을 협박하여 독립운동자금을 빼앗아 서간도에 무관학교를 세우려 했다는 소위 안명근(安明根안중근의 종제)사건의 관련자로 5월에 체포당함.

1914(甲寅)

39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17년형을 선고받아 복역 중 감형되어 7월 가출옥 됨.

辛丑

1919(己未)

44

 

3·1운동이 일어나자 압록강을 건너 상해로 망명.

 

辛丑

1927(丁卯)

52

약체화된 당시 임정의 처지와 구성원상 국무령제로는 내각 구성조차 어려워 국무위원제로 개정하여 국무위원 겸 주석이 됨.

壬寅

1932(壬申)

57

 

이봉창(李奉昌윤봉길(尹奉吉)의 의사가 있은 후 일경의 탄압이 강화되자 상해를 탈출.

壬寅

1933(癸酉)

58

 

난징[南京] 에서 장제스[蔣介石]을 만나 광복군 무관양성소 설치와 항일전투방략을 협의.

壬寅

1934(甲戌)

59

 

국무위원직을 박탈당함.

 

癸卯

1940(庚辰)

65

조선혁명당· 한국독립당· 한국국민당 등 3당을 한국독립당의 이름아래 통합하여 집행위원장에 추대되었으며, 임시정부 국무회의의 주석으로 선출 됨.

癸卯

1941(辛巳)

66

 

1295개항의 대일선전포고문을 발표하고 임전태세에 돌입.

癸卯

1942(壬午)

67

 

7월에는 중국정부와 광복군에 대한 정식협정을 체결하여 연합군과 더불어 항일공동작전에 나설 수 있는 기초를 마련.

癸卯

1944(甲申)

69

4월 충칭 임시정부 주석에 재선되었으며, 부주석에 김규식, 국무위원에 이시영·박찬익(朴贊翊)을 선출하고 결전을 위한 준비에 박차를 가함.

癸卯

1945(乙酉)

70

 

미군정은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1123일 개인자격으로 김규식 등 임정 국무위원들과 귀국

癸卯

1948(戊子)

73

41938선을 넘어 평양에서 열린 전조선 정당사회단체대표자연석회의와 남북요인회담, 김구·김규식·김일성·김두봉의 4자회담에 참석하고 55일 서울에 돌아 옴.

癸卯

1949(己丑)

74

 

626일 집무실인 경교장(京橋莊)에서 육군 현역 장교 안두희(安斗熙)가 쏜 총탄을 맞고 서거.

우리나라 나이로 기입했음.

출처 : 한국 프로 사주 학회
글쓴이 : 혜도짱(전정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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