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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채 선생(蔡 先生)의 八字

일통 2012. 7. 12. 11:40

채 선생(蔡 先生)의 八字

 

 

 

과학의 발달로 달나라에 가는 세상이 되었고 과학을 이용하여 일기를 예측하고 일월(日月)천지(天地)의 변화를 예측하지만 한 개인의 성쇠진퇴(盛衰進退)는 예측할 수 없다.

 

과학으로 사물의 예측할 수 있는 것은 가까운 장래를 예측 할 수 있지만 10년 후나 20년 후나 또는 몇 십 년 후는 예측하지 못한다.

 

그러나 명리학은 10년 후나 몇 십 년 후를 예측 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기묘한 사건이 있으면 믿기 어렵기도 하겠지만 사실로 존재해도 사람들은 믿지 않는 경우가 많다.

 

명리학의 원리를 관찰해보면 그 동안 명리학은 많은 발전을 하여 현실에 딱 맞아 들어가게 되어 현대과학의 우수성을 뛰어 넘은 것이다. 아래는 내가 30여 년 전에 친구의 命을 평(評)했던 것으로 실제 있었던 일이다.

 

1936 丙子년에 내 친구 채 선생(蔡 先生)은 학교를 운영하였는데 산두(汕頭)의 부근에 있는 작은 도시에 사립학교를 세웠다.

 

삼형제가 힘을 합쳐 조그마한 규모로 운영하였는데 당시의 사회 환경에서 사립학교를 운영하는 것은 학생의 수업료로 유지하기 때문에 고생스럽고 평범하였다.

 

나는 그 외에 몇몇의 친구와 어울렸고 해가 저물면 학교에 자주 갔었는데 하루는 문득 모두가 命理에 관한 화제로 이어졌다. 당시에 丘 先生(구 선생)은 산두(汕頭)에서 장사를 했고 徐 先生(서 선생)은 사업을 했었다.

 

그들은 모두 명리학을 확실히 믿고 있었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열기가 고조 되었다. 채 선생은 명리에 대해서 잘 알고 있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의 출생일시를 써 놓고 함께 연구하였다.

 

아래의 戊申年(1908) 八月 二十八日 巳時가 채 선생의 팔자다.

 

乙運發 丑運破 (을운발 축운파)

 

 

〔7〕蔡 先生 (채 선생)

 

 

(乾) 1908年 8月 28日

 

戊丁丙乙甲癸壬 運 癸辛辛戊

辰卯寅丑子亥戌 五 巳巳酉申

 

양 력: 1908년 9월 23일 10:00

음/평: 1908년 8월 28일 10:00 남자

 

시 일 월 년

癸 辛 辛 戊

巳 巳 酉 申

 

庚 己 戊 丁 丙 乙 甲 癸 壬 대운: 순행

午 巳 辰 卯 寅 丑 子 亥 戌

85 75 65 55 45 35 25 15 5.4

 

대운 시작: 5세 4월 25일, 辛금당령, 申酉공망, 12운성: 사사록왕

 

 

 

이 사주를 보고 각자가 한 마디씩 했는데 보는 방법이 각각 달랐다. 채 선생이 나에게 어떻게 풀었느냐고 물어서 내가 말하길「辛金이 가을에 생하여 튼튼한데 年 月의 干에 印比가 투출하였고 地支에는 方局을 이루었으니 旺은 남아도는데 겨우 時에 하나 있는 癸水가 수기(秀氣)를 갖고 있으나 아깝게도 干支에 木이 없다.

 

따라서 교육에 종사하여 영재를 길러내는 것이 마땅하다. 다행이 태원(胎元)에 壬子가 있고 명궁(命宮)의 乙卯를 水生木으로 순생(順生)이 되니 장래 乙運에 반드시 크게 피어난다. 그러나 丑運에는 반드시 깨진다.」

 

채 선생이 갑자기 웃더니 말하길「일개 가난한 선생이 돈을 벌수도 없을뿐더러 더구나 큰돈을 어떻게 벌고 또 돈을 번 다음 왜 그 돈이 모두 없어질까?」그는 이 두 가지 사건이 모두다 가능성이 없다고 하였다.

 

구 선생(丘 先生)과 서 선생(徐 先生)은 나의 설명에 일리가 있다고 했다. 나는 그 이유를 다시 해석하길 乙運은 辛生癸 癸生乙로 즉 순서대로 상생하는데 身旺하여 財를 감당하므로 크게 富를 이룬다.

 

그러나 丑運은 巳酉丑 金局이 劫財局이고 身旺에 劫財를 꺼리므로 그 돈이 깨끗이 없어진다고 설명했다.

 

그들 모두가 다시 연구하면서 丙寅 丁卯의 運은 東方 運이므로 당연히 좋은 運이라고 하였지만 오직 나 혼자서 절대 아니라고 했다.

 

내가 말하길 「좋은 運은 항상 있는 것이 아니고 성대한 연회가 두 번씩 열리기는 어려운 법이다.」라고 하자 그들은 그 이유를 물었다.

 

내가 또 설명하길 건록격(建祿格)은 戊 印星이 투출하는 것을 꺼리는데 丙寅 運의 丙火가 戊土 印星을 生하여 힘을 얻은 기신(忌神)이 다시 일주를 돕고 地支의 寅은 寅申 冲이 되어 財가 劫을 만나는데 財가 없기 때문이다.

 

丁卯 運의 丁火 역시 土를 생하고 地支의 卯는 卯酉 冲이 일어나 財星이 겁탈을 당하는데 역시 財가 없기 때문에 극처(剋妻)를 막아야한다. 食神이 制殺하기 때문에 자식이 잘 되고 자녀들이 성장하여 공부를 마친 후 사회활동을 하여 돈을 모은다.

 

그러나 그것은 절대로 본인의 運으로 돈을 버는 것이 아니고 자식이 벌어드리는 것이다. 즉「성대한 잔치를 두 번 갖기는 어려운 법」이다.

 

 

그 후 얼마가지 않아 동북지방에 일본군의 침략이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강 건너 불처럼 생각하고 평상시처럼 태연하게 근무하고 있었는데 1937년부터 점점 확산되어 廣東(광동)에까지 번지고 1939(己卯)년에는 潮汕(조산)이 일본군에게 점령을 당하여 결국 학교 문을 닫았다.

 

일본군들이 이 지역을 점령하여 대수롭지 않은 일에도 무서워서 떨고 산천초목이 모두 일본군으로 보였고 채 선생은 매일 걱정에 싸여 있었다.

 

후방으로 가서 자유롭게 살아볼 궁리를 하던 중 乙運에 적지 않은 돈을 번다는 말이 정말 맞는지 나를 찾아왔다.

 

내가 그에게 전하길「아직은 그 때가 되지 않았지만 때가 임박했으니 기다리면 바라는 대로 광활하고 평탄한 길로 직행한다.」「乙 運에 피어나는 것은 정해진 것이고 얻는 것도 적지 않다.」라고 나는 또 다시 그에게 진지하게 일렀다.

 

 

 

토지세 분과 주임

 

그 후 그는 일본군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후방의 한 마을로 가족들과 함께 이사를 했다. 그들 부부는 산골의 공립학교 교원생활을 하면서 안정을 찾았고 소박하고 담담한 생활을 보냈다.

 

命運이라는 추상명사는 현실적인 것이고 또한 한 사람의 경우에 해당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제부터 그 命運의 현실을 살펴보자.

 

채 선생의 남동생이 북경(北京)에서 做士(주사)로 근무하고 있었던 관계로 채 선생은 불과 몇 년이 지나지 않아 그 산골에서 단번에 전문임원으로 승진 되었고 그곳에서 채 선생과 고향이 같은 방 선생(方 先生)과 사이가 좋았었는데 방 선생(方 先生)은 당시에 廣東(광동)의 소관(韶關)에 있는 임시성회(臨時省會)의 성부위원(省府委員)이었다.

 

속담에 좋은 것을 얻으려면 때가 되고 運이 와야 한다고 했는데 乙運에 들어서기 일 년 전쯤 되는 1943(癸未)년 겨울이었다.

 

그 곳 산성현(山城縣)의 현장(縣長)이 바뀌었는데 새로 부임하는 현장(縣長)의 姓은 朱 氏(주 씨)이었는데 조주(潮州)사람이었다.

 

그 朱 縣長(주 현장)이 소관(韶關)에 취임하기 전에 방 위원(方 委員)이 먼저 朱 縣長(주 현장)을 찾아가 채 선생을 추천하였고 또 한 편으로는 채 선생에게 편지를 하여 朱 縣長(주 현장)을 찾아 인사를 하도록 하였다. 이리하여 채 선생은 토지세 분과 주임이 되었다.

 

그런데 당시의 토지세 분과를 작은 부서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그 때가 전시(戰時)의 특별한 상황인데다 그 지방의 특수한 환경으로 인하여 곡물가격은 폭등하였고 화폐가치는 계속해서 떨어졌다.

 

아주 공평하게 업무를 처리 했는데도 몇 년 지나지 않아서 홍콩화폐로 백만 원이 넘는 돈을 벌었고 그는 부자가 되었다. 이것이 바로 乙運을 만난 것이다.

 

십 수 년 전에 내가 그에게 말한「乙運必發 發得不小 (을운필발 발득불소) 즉 乙運에 반드시 피어나고 얻는 것이 적지 않다.」의 이야기가 적중했다.

 

 

 

겁재를 막아라!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일본군이 투항한 1945(乙酉)년 가을에 내가 산두(汕頭)에 돌아 왔을 때도 채 선생은 山城(산성)의 주임으로 있었는데 그는 여전히 좋은 상황이었다.

 

당시에 중국의 통화가 팽창하여 일반인은 모두 피해를 보았는데 채 선생은 가지고 있는 모든 돈을 미국달러 홍콩화폐 금괴로 바꾸었기 때문에 다행히 손실이 없었다.

 

이것이 바로 그의 좋은 運 중에 일어난 일이다. 運이 좋아지면 생각이 영민(靈敏)해지기 때문에 통화팽창으로 인한 손실을 당하지 않았다.

 

丁亥 년에 내가 공무 때문에 산성(山城)에 갔을 때 채 선생은 나를 아주 기쁘게 맞아 주었고 또 같이 술을 나누었다.

 

그는 나에게 십여 년 전의 예언에 감탄한다고 말하면서 일개 가난한 교사가 인연과 때를 만나 백만(百萬)의 부자가 되었고 지금 생각해도 꿈만 같다고 하면서 앞으로 오는 丑運이 어떤가를 물었다. 나는 예전에 한 말과 똑같이 丑 運은 파득정광(破得精光 즉 모두 다 없어진다.)이라고 말했다.

 

그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투기나 모험을 하지 않았고 아이들도 아직 어린 학생인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돈이 깨질 일이 없고 더구나 모조리 없어질 가능성은 전혀 없다고 했었다.

 

내가 그에게 말하길「명운(命運)의 추세를 살펴보면 파득정광(破得精光)이지만 도대체 어떻게 깨지고 어떻게 해서 모조리 없어지는지 나 역시도 모른다. 다만 巳酉丑이 劫財 局을 이루는데 이것은 일종의 겁탈(劫奪)이라는 뜻이다.」라고 설명했다.

 

그는 겁탈을 미리 막아내기로 작정하고 만사를 보수적으로 행동하였다. 그는 도둑을 맞지 않도록 방비를 했고 누구에게도 돈을 빌려주지 않았고 직장동료들은 물론 상사에게도 거슬리지 않도록 조용히 지냈다.

 

그러나 큰 재산을 지키기 위하여 직장을 그만두고 마침내 금의환향(錦衣還鄕)하게 되었다. 재산을 겁탈 당하지 않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아주 세심한 관리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戊子(1948)년에는 대륙에 범람한 공산주의가 화남(華南)까지 밀려왔고 己丑(1949)년 겨울에는 조산(潮汕)역시 공산화 되었다.

 

그는 이미 丑運에 들어 와 있었기 때문에 돌변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 처자식을 지킬 대책은 홍콩으로 가서 생활하는 길 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미 수로가 단절되었기 때문에 부득이 육로를 통하여 홍콩으로 올 수 밖에 없었고 가재도구를 운반할 수 없었기 때문에 새로 준비하느라 많은 돈이 소모 되었다.

 

당시에 내륙에서 홍콩으로 들어가는 것을 엄격하게 제한하였으나 결국 庚寅년 正月 十五日 홍콩에 들어왔다.

 

 

 

「破得精光 (파득정광)」

 

庚寅(1950)년은 天干에 劫財가 투출하고 地支는 寅申 冲(申中에 庚金도 劫財다. )이다. 丑運에 있고 巳酉丑이 되어(劫局) 사면(四面)에서 초가(楚歌) 소리만 들리면서 형제들은 공산당에게 끌려갔고 대륙에 있는 재산은 공산정부에게 전부 몰수당했다.

 

처와 자식도 대대로 살던 집에서 쫓겨나게 되어 육로를 통하여 홍콩에 도착하는데 삼 개월이 걸렸다. 그가 가지고 있던 재산이「겁(劫)」때문에 단숨에 없어진 것이다.

 

홍콩으로 빠져 나오긴 했으나 의식주 마련을 위해 乙運에 벌었던 돈이 모두 소모되고 결국 맨손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조상이 물려준 전답과 가옥은 모두 공산당에게 겁탈 당한 것이다.

 

즉 丑運에 한바탕 크게 겁탈 당하여 겨우 몸만 빠져 나왔다.

 

내가 십 수 년 전에 평(評)한「丑運必破 破得精光 (축운필파 파득정광)」란 말이 불행이도 적중하였다. 그러나 정광(精光)의 정도는 내가 생각한 이상으로 없어진 것이다.

 

그러나 앞으로 5년 이라는 길고도 먼 밤인 丑字의 악운(惡運)이 시작된다. 사람이 감당할 수 없는 회오리바람이 몰아치고 광풍이 낙엽을 쓸어버리는데 앞으로 남은 3~4년이 丑運의 범위 내에 있으니 어찌해야 칠흑 같은 밤을 지나갈 수 있을지 정말 골치 아픈 일이다.

 

온 가족의 생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노력했지만 庚寅 辛卯 년은 가장 곤란하고 어렵게 살았고 壬辰 癸巳 년은 다행히 水가 金을 설기하는 덕에 공장에 직원으로 취직이 되어 간신히 丑運을 보냈다.

 

즉 命局에 남아도는 旺한 氣를 소화하기 위하여 泄氣와 財를 좋아하고 劫財를 꺼리기 때문이다. 乙運이 좋고 丑運에 무너지는 것은 증감(增減)의 원리로서 이것이 바로 命運과 物理가 현실에 딱 맞아 떨어진다.

 

丙寅, 丁卯運은 어떻게 되었을까? 십 수 년 동안 채 선생은 공장에서 일을 해 왔으니 지금은 승진도 했고 생활도 안정되었다. 자녀도 모두 성장하여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나와서 일을 하므로 가정에 부담이 되지 않는다.

 

지난해 상처(喪妻)를 하였고 다시 장가를 들어 생활이 평범하고 안정 되었다.

 

30년 이전에 평한 것이 증명하듯「好景不常 盛筵難再。(호경불상 성연난재) 좋은 경기는 항상 지속 되는 것이 아니고 큰 잔치가 또 다시 열리기는 어렵다.」그 말이 또 적중하였다.

 

즉 20년이 지나도록 한 번도 옛날의 위풍을 회복할 기회가 없었다. 이것이 바로 命運이고 物理와 부합되는 한 개인의 득실(得失)이다.

 

 

 

譯者註 : 尤 達人의 著書로는 “命理通鑑(二冊)” “現代名人命鑑” “知命四十年” “人生哲學講座” 등이 있다.

 

 

출처 : 사주명리(좋은사람 정모카페)
글쓴이 : 도무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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