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호사설 제1권
태을술(太乙術)
태을(太乙) 육임(六壬)의 방법은 장량(張良)의 《적정경(赤霆經)》에서 나왔다. 괴벽한 사람들은 지금까지도 그 방법을 전수하여 간혹 맞히는 수도 있기 때문에 없어지지 않고 세상에 전한다. 나는 본시 이런 것을 믿지 않기 때문에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인조(仁祖) 갑신년(1644)에 심기원(沈器遠)의 일당인 권두창(權斗昌)이란 사람이 특이한 재주를 지녀서 세상에서 관중(管仲)과 제갈량이라고 하였다. 태을의 수로 추측해 보고 “이해에 천하에 혁명이 일어날 것이며 반란 사건이 비로소 평정된다.” 하였는데, 이해에 명(明) 왕조가 망하였으나, 제가 어떻게 이것을 알아냈겠으며, 또 어디에서 사건이 발생한다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 넓은 천하에 수억만 개가 되는 나라와 지역에서 어떻게 큰 숫자만 가지고 추측해 낼 수 있겠는가? 명(明) 왕조가 망한 것이 우연히 이 시기에 들어맞았을 뿐이다. 남단과 북단, 극동과 극서의 운명이 반드시 다 같을 이치가 없을 것인즉, 결국은 아무 소용이 닿지 않은 속임수에 불과하다.
나의 할아버지 지평공(持平公)께서는 사람을 알아보는 안목이 있었다.
그는 어떤 사람에게, “공자의 옷을 입고 공자의 말을 말하는가? 내가 보니 권두창(權斗昌)은 눈이 단정한 듯하면서도 간사스럽고 얼굴은 근엄한 듯하면서도 애교를 부리고 말은 엄숙한 듯하면서 편협하고 모든 일에 옛날 경전을 인용하면서 성질이 못되었고 바르지 못하였다. 그 사람을 어떻게 훌륭하다고 하겠는가?” 하였는데, 이 말을 듣는 사람이 공에 대하여 불공평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았으나, 그가 처형을 당하게 되자 모든 사람은 비로서 탄복하였다.
열하일기(熱河日記) 박지원(朴趾源) 중 일신수필(馹?隨筆)
일신수필(馹?隨筆) 7월 15일 신묘(辛卯)에 시작하여 23일 기해(己亥)에 그쳤다. 모두 아흐레 동안이다. 신광녕(新廣寧)으로부터 산해관(山海關) 안에 이르기까지 모두 5백 62리다.
21일 정유(丁酉)
비오다 개다 하다.
강물에 막혀서 동관역(東關驛)에 머물렀다. 들으니 옆 사관에는 등주(登州)에서 온 이 선생(李先生)이란 자가 있어서 점을 잘 치고, 또 사람을 시켜 우리나라 사람을 보고자 한다 하기에 식후에 찾아갔다. 그의 점치는 법은 태을수(太乙數)를 본다 한다. 나는 그에게,
“이게 자미두수(紫微斗數)가 아니오.”
, 내 본시 성미가 관상(觀相)이나 사주(四柱 생년ㆍ월ㆍ일ㆍ시) 같은 걸 좋아하지 않으므로 평생에 그 법을 알지 못하고, 또 그가 말한 육임ㆍ둔갑이라는 것이 몹시 허망한 것이므로 사주를 내어 주지 않았다. 보아하니 그 자 역시 그의 술수를 과장하여 많은 복채를 낚으려다가 내 기색이 매우 냉담함을 살피고 다시 말하지 않았다.
국조보감 제78권
○ 하교하기를,
담헌서(湛軒書) 외집 2권(外集 卷二)
항전척독(杭傳尺牘)
건정동필담(乾淨?筆談)
...난공이 “내가 젊어서 방자하게 범남(汎覽)하여 병서도 대략 보았다. 《태백음경(太白陰經)》과 《망강남사(望江南詞)》와 《화룡비서(火龍秘書)》와 《육임병전(六壬兵詮)》 따위가 그것이다.”
내가 “육임은 모두 거짓말이다.”
난공이 “이 책은 황석공(黃石公)을 위탁(僞托)하여 지은 것이다.” 또 “육임의 글을 믿을 것이 못된다고 보는가?”
내가 “형은 믿는가?”
난공이 “집에 이런 유의 책이 두어 종류 있는데, 우연히 보니 잘 알 수 없다.” 하고, 한 책을 내보이는데 제(題)하기를 《묵연재 장서(墨緣齋藏書)》라 하였다. 그 속에 《육임제서(六壬諸書)》 십수 종이 있었다.
역암이 “기문둔갑(奇門遁甲)의 진부와 태을(太乙)이 어떠한 것인가?”
내가 “제는 이런 책들을 혹 본 것도 있고 혹 보지 못한 것도 있지만 모두 잠꼬대 같은 것으로 안다. 병서는 오직 손오(孫吳)가 가장 보암직하다.”
난공이 “손오는 모두 보았는데 다른 책처럼 기발함이 무궁하지 못하다.”
역암이 “《손자(孫子)》ㆍ《오자(吳子)》ㆍ《울요자(尉?子)》 등은 설령 병을 말하지 않더라도 그 의리만도 아름다운 것인데, 이를 버리고 반드시 둔갑과 육임 등의 서를 좋아하니 호기의 지나치다.”
살옥안(殺獄案)에 대한 형조의 복계(覆啓)를 판하하였다.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