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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적천수 강약장 및 중과장

일통 2011. 3. 13. 12:01

공부란 아다세주 선생님처럼 심도 있게 해야 하는데, 고전은 읽어보지도 않고 믿을 게 못 된다고 말하거나, 더 나아가 고전을 읽는 이를 멍청한 학인이라고 몰아붙이는 학인들이 많은 점은 아쉬운 세태라 생각합니다. 알고서 불필요하여 버리는 것과 모르고서 모른 채 사는 것과는 천양지차가 있는 것이라 생각하며, 무식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이상하다고 생각합니다. 아래 원본글 사이 화살표(=>) 부분에 제 의견을 답니다.

 

 

적천수의 중과衆寡에 대한 해석 |명리마당(이론)

adaseju | 2011.03.13. 05:00 | http://cafe.daum.net/2040/MsI/39034

 

 

적천수의 중과衆寡에 대한 해석

 

 

1. 첫머리에

 

적천수滴天髓는 시구詩句로 된 원문과 원주 그리고 임철초 선생을 위시하여 여러 대가들의 주석서 등이 있다. 본인이 ‘적천수의 저자에 대하여’의 글에서 밝힌 바와 같이 적천수의 원문과 원주의 작자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아직까지는 없다.

 

가장 신빙할 만한 최초의 기록은 소암노인素菴老人 진지린陳之遴 상국相國이 적천수집요滴天髓輯要의 서문에서 밝힌 바와 같이 “적천수란 책은 바로 어떤 지명자知命者가 저술한 것으로 성의백誠意伯 유기劉基에 가탁했다.”라고 한 것이다. 그러나 그 지명자가 어떤 사람인가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는데, 강희康熙 시대에 황우직黃虞稷이 천경당千頃堂에서 목각본木刻本으로 간행한 명리수지적천수命理須知滴天髓 표제表題에는 경도京圖가 저술하고 유기가 주석한 것으로 되어 있다.

 

한편 1937년 서락오徐樂吾 선생이 저술한 적천수보주滴天髓補註 서문에서 “연보年譜에 보면 경도가 찬하고 유기가 주해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글을 자세히 살펴보니 본문과 주석이 한 사람의 손에서 나온 것이 틀림없다.”라고 하여 원문과 주석을 모두 유기가 저술한 것으로 단정하고 있다. 근래 다른 역학자들도 대부분 이 주장을 받아들여 적천수의 작자는 유백온 선생이라는 설이 굳어진 때가 오래되었다.

 

그러나 이 중과장에서 확인하는 바와 같이 원문과 원주는 그 뜻이 서로 판이하게 다르며, 그 밖에 장에서도 원문과 원주의 상이점을 무수히 발견할 수 있다. 그러므로 원문과 원주의 작자는 동일인이 아닌 것도 또한 명백한 사실이다.

 

아래에서는 먼저 중과장 원문의 구성상 특성과 원문에 대한 우리나라 역학자의 몇 가지 해석과 본인의 해석을 밝히고, 그 다음 원주와 철초 선생의 주석 그리고 서락오 선생과 종의명 선생의 주석이 어떻게 원문의 원의를 발양하고 또 손상시켰는가를 살펴보면서 그 변화과정을 추구해보고자 한다.

 

 

2. 적천수 중과장의 원문

 

적천수 중과장의 문장이 그렇게 난해하지는 않지만 정확하게 해석하기가 상당히 어렵다. 상하의 문장이 서로 대응하여 오히려 그 뜻이 더욱 명백하게 드러나 있지만, 단지 한 글자 곧 강强자를 가볍게 보고 그냥 넘어가기 때문에 지금까지 온당한 해석이 나오지 못한 것이다. 일단 본문을 옮겨놓고 문장의 구성을 살펴보자.

 

강중이적과자. 세재거기과. 强衆而敵寡者. 勢在去其寡.

강과이적중자. 세재성호중. 强寡而敵衆者. 勢在成乎衆.

 

위 문장을 강중이적과强衆而敵寡와 강과이적중强寡而敵衆이 대응하고 세재거기과勢在去其寡와 세재성호중勢在成乎衆이 서로 대응하고 있다. 여기에서 해석상 문제가 되는 부분은 앞부분이고 뒤의 세재勢在 이하는 문제가 될 것이 없다. 그러므로 뒷부분은 논의에서 제외한다.

 

强衆而敵寡와 强寡而敵衆의 문장을 살펴보면 강强과 적敵이 서로 대응하고 중衆과 과寡가 서로 대응한다. 적천수의 핵심내용 중에 하나가 쇠왕衰旺 강유剛柔 또는 중과衆寡의 장에서 확인하는 바와 같이, 사주나 일주 등의 강약 또는 쇠왕 강유 중과 등에 대한 분별에 있다. 이 강약과 왕쇠 강유 중과는 단어만 다를 뿐이고 그 뜻을 음미해보면 동일한 개념이라고 판단해도 크게 그르치지는 않을 것이다.

 

 

3. 일반적인 해석

 

强衆而敵寡와 强寡而敵衆을 번역하는 방법은 두 가지이다. 먼저 강과 적을 주부로 해석하고 중과 과를 술부로 해석하는 것이며, 또 하나는 강과 적을 중과 과라는 목적어에 대한 동사로 해석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두 가지 방법으로 해석하는 경향은 우리나라 역학자들뿐만 아니라 중국의 역학자들 사이에서도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이미 출간된 판본의 번역을 한번 보자.

 

1)의 사례

 

강한 성분은 많고 이에 대적하는 성분은 적은 경우에는 세력이 적은 것을 제거하는 성분에 있으나, 강한 성분은 적고 이에 대적하는 성분은 많은 경우에는 세력이 많은 것의 뜻을 이루어주는 성분에 있다네.

 

2)의 사례

 

강한 것이 무리를 이루어 적은 것과 대적하는 경우에 그 형세는 적은 것을 제거하는데 있으며, 강한 것이 적으나 많은 무리를 대적하는 경우에 그 형세는 무리를 이루는데 있다.

 

3)의 사례

 

강한 것이 많고 적이 적은 것은 세력이 그 적은 것을 버리는데 있고, 강한 것이 적고 적이 많은 것은 세력이 그 많은 것을 돕는데 있다.

 

위 사례 중에 1)과 2)의 번역문은 본인이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 나온 적천수 중에 가장 정확하게 잘 번역되었다고 생각하는 판본’의 해석이고, 3)의 번역문은 본인이 다른 판본의 해석을 조금 보완한 것이다.

 

 

4. 위 해석의 문제점

 

철초 선생은 적천수천미의 주석에서 중과를 이르기를, “중과의 설은 강약을 의미한다.(衆寡之說 强弱之意也)"라고 간단명료하게 정리해 놓았다. 그렇다면 원문에 중과衆寡를 강약强弱으로 대치하여 해석해도 전혀 문제점이 없어야 정상일 것이다. 그러나 중과를 강약으로 한번 대치하여 해석해보면 문제점이 곧바로 명백하게 드러난다. 편의상 위 3)의 사례를 기준으로 삼겠다. 그 해석은 아래와 같다.

 

强衆[强]而敵寡[弱]者 勢在去其寡

强寡[弱]而敵衆[强]者 勢在成乎衆

 

강한 것이 ‘강’하고 적이 ‘약’한 것은 세력이 그 적은 것을 버리는데 있고,

강한 것이 ‘약’하고 적이 ‘강’한 것은 세력이 그 많은 것을 돕는데 있다.

 

위 문장 중에 '강한 것이 강하고'라는 구절과 ‘강한 것이 약하고’라는 구절은 그 뜻을 아무리 이치에 맞게 해석하려고 해도 맞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강중强衆과 강과强寡의 강强자를 강하다고 해석해서는 안 되는 이유이다.

 

사주팔자 중에 신이 많이 모이면 강해지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강한 것이 많고’ 또는 ‘강한 것이 약하고’에서 강한 것을 굳이 억지로라도 한번 해석해 본다면 양간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강한 것이 적고’도 양간이 적다고 해석해야 할 것인가? 만일 그렇다면 이 중과장에서는 음간을 일체 배제하는 형상이 된다. 그래야만 할 필연적인 이유가 있을까? 전혀 없다. 그러므로 강자를 강한 것이라 해석해서는 안 된다.

 

특히 강중强衆과 강과强寡의 강자를 강약의 강 개념으로 해석한다면 강强자와 대응하는 적敵자도 강약의 약 개념으로 해석해야 옳을 것이다. 그러므로 위의 해석이 모두 온당하지 않다고 단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5. 본인의 해석

 

논어의 위정爲政 편에는 안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공자님이 자로에게 가르쳐주신 말씀이 있다.

 

자로야, 안다는 것이 무엇인지 가르쳐줄까? 아는 것은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하라. 그것이 아는 것이다. 子曰, 由 誨女知之乎 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 是知也.

 

학문學文이란 무엇인가? 글을 배운다는 것은 한마디로 말하면 안다는 것이다. 그러면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분별하여 아는 것이다. 어떤 학문이든 알면 알수록 모르는 것이 더 많아진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어떤 학문의 대가일수록 그 분야에 모르는 것이 더 많다고 말할 수도 있다. 알아야 비로소 무엇을 알고 있고 무엇을 모르고 있는 줄을 안다. 알지 못하면 무엇을 모르는 줄을 전혀 모른다.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바로 정비례한다.

 

그러므로 고인이 안다는 한 글자를 찬탄하여 이르기를 “안다는 한 글자가 중묘의 문이다.(知之一字 衆妙之門)”라고 말한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가를 분명하게 알지 못한다. 이 때문에 범부의 신세를 평생 면하지 못하는 것이다.

 

본인은 명리학에 전문가는 아니다. 다만 요즈음 전문으로 연구할 작정을 하고 공부 중에 있다. 성격이 어떠한 사안에 대하여 그 뜻이 명백하게 드러나지 않으면 끝까지 확인하는 편이다. 완벽을 추구한다고 말할 수도 있다. 이 중과장에 대한 글을 다시 쓰고 있는 것도 사실은 중과장에 대한 여러 판본의 강자에 대한 해석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중과장의 강자를 이 사전 저 자전을 찾아가며 이리저리 연구하다가 한번은 강희자전을 찾아보았다. ‘자시야自是也’라는 해석이 나온다. 자기 곧 나라는 뜻이다. 적천수의 술어로 말한다면 사주팔자 중에 일주이고, 또는 체용 중에 본체이며, 명국과 운세 중에 명국이다. 이 때문에 본인은 강자를 자기라 해석했다. 강을 자기로 해석하고 적을 상대로 해석하면 뜻이 더욱 명백하게 드러나며, 특히 “중과의 설은 강약을 의미한다.(衆寡之說 强弱之意也)”라고 설파한 철초 선생의 주석에 의거하여 중과를 강약으로 대치하면 그 뜻이 더욱 명백하게 드러난다.

 

强衆而敵寡者. 勢在去其寡.

强寡而敵衆者. 勢在成乎衆.

 

자기는 많은데 상대가 적은 것은 형세가 그 적음을 제거함에 있고, 자기는 적은데 상대가 많은 것은 형세가 그 많음을 이루어줌에 있다.

 

자기는 강한데 상대가 약한 것은 형세가 그 약함을 제거함에 있고, 자기는 약한데 상대가 강한 것은 형세가 그 강함을 이루어줌에 있다.

 

세勢자는 세력 형세 추세 기세 힘 모양새 등으로 번역할 수 있다. 세력이란 말은 중과의 많음과 혼돈을 줄 수 있으므로 여기에서는 배제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이 문장은 세勢자가 주어이므로 세자가 드러나게 해석해야 한다.

 

이상에서 확인하는 바와 같이 强衆而敵寡와 强寡而敵衆의 문장은 그렇게 난해한 문장은 아니다. 다만 지금까지 모든 역학자들이 강자에 대하여 의문을 갖지 않았을 뿐이다. 왜냐하면 누구나 아는 너무 쉬운 글자이기 때문이다. 한문을 공부하다 보면 갈지之자에 막힌다는 말이 있는데 진실로 옳은 말이라 하겠다.

 

어떻든 사실이 그러하다보니 우리나라의 역학자뿐만 아니라 중국의 모든 역학자들까지도 이 강자를 명백하게 해석한 사람이 아직까지는 없다. 적천수 원문의 작가를 제외하면 원주의 작가를 위시하여 적천수천미의 임철초 선생이나 서락오 선생 종의명 선생 등도 이 강자에 막힌 것은 마찬가지이다. 아래에서는 원주 이하의 여러 주석을 살펴보겠다.

 

 

6. 중과强寡의 제명은 강약强弱이 옳다

 

1) 적천수집요와 적천수천미의 원문이 서로 다르다

 

적천수라 하면 통상 철초 선생의 적천수천미나 적천수징의를 연상하지 적천수집요를 연상하지는 않는다. 곧 소암노인이 편집한 적천수집요는 철초 선생이 주석한 적천수천미만큼 세상에 널리 알려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또한 역학계에서 그 비중이나 영향 공적 등이 크게 미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적천수천미 중과장의 원문이나 그 제명에 대해서도 이의를 제기하는 역학자들이 지금까지는 거의 없었던 것 같다, 그러나 적천수집요와 적천수천미의 원문이 서로 다르다는 점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본다.

 

2) 집요의 用强捨弱者玄機의 용강사약用强捨弱이 핵심이다

 

적천수집요에는 원문이 “抑强扶弱者常理 用强捨弱者元機”이고, 원주는 “强衆而敵寡者 勢在去其寡 强寡而敵衆者 勢在成乎衆 强寡而敵衆者 喜强而助强者吉 强衆而敵寡者 惡敵而敵衆者滯也”이며, 적천수천미의 원문은 “强衆而敵寡者 勢在去其寡 强寡而敵衆者 勢在成乎衆”이고, 원주는 “强寡而敵衆者 喜强而助强者吉 强衆而敵寡者 惡敵而敵衆者滯”로 되어 있다.

 

적천수집요와 적천수천미의 원문을 비교해 보면, 첫째 집요의 원문이 천미에는 없다는 점이고, 둘째 천미는 집요의 원주 앞부분을 원문으로 취용하고 뒷부분을 원주로 남겨놓았다는 점이 크게 차이가 난다.

 

천미의 원문과 원주만 가지고 논한다면 제명이 중과가 옳을 것이다. 그러나 집요의 원문과 원주에 의거하면 “강한 신을 쓰고 약한 신을 버리는 것은 현기玄機이다.(用强捨弱者元機)”라는 문장 중에 용강사약用强捨弱이란 구절이 핵심이기 때문에 이 구절을 취하여 강약이라 제명하는 것이 더 옳았을 것이라 판단한다. 만일 임철초 선생이 적천수천미를 주석하며 제명을 중과라 하지 않고 집요의 원의에 따라 강약이라 정했다면 지금과 같은 혼란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7. 적천수집요 원문과 원주의 해석

 

1) 소암노인의 적천수집요에 의거하여 원문과 원주를 구분하다

 

소암노인의 적천수집요에 의하면 위 6.항에서 확인한 바와 같이 중과장의 원주 앞에 원문으로 “억강부약자상리抑强扶弱者常理 용강사약자원기用强捨弱者元機”라는 문장이 더 있다. 이를 집요에 의거하여 원문으로 간주하고 이하를 원주로 보는 것과 천미에 의거하여 강중이적과자强衆而敵寡者 이하를 원문으로 간주하고 그 이하를 원주로 해석하는 데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천미에 의거하여 원주를 해석하면 원문과 원주의 주장이 서로 다를지라도 논주가 다르기 때문에 크게 문제가 될 것은 없지만, 집요에 의거하여 원주를 해석하면 천미의 원문과 원주가 모두 한 사람에 의해 작성된 문장이 되기 때문에 그 뜻이 서로 상통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 이 점이 문제이다.

 

2) 적천수집요의 원문에 대한 해석

 

집요의 원문에 이르기를, “강한 신을 억제하고 약한 신을 보조하는 것은 상리常理이고,(抑强扶弱者常理) 강한 신을 쓰고 약한 신을 버리는 것은 현기玄機이다.(用强捨弱者元機)”라고 하였다.

 

첫째 “강한 신을 억제하고 약한 신을 보조하는 것은 상리常理이다.”라고 한 것은 사주의 일반법칙을 밝힌 것이다. 일반법칙인 상리 곧 억강부약抑强扶弱을 여기서 의론할 것은 없다. 다음 “강한 신을 쓰고 약한 신을 버리는 것은 현기玄機이다.”라고 한 것은 사주의 특수법칙을 밝힌 것이다. 특수법칙인 현기 곧 용강사약用强捨弱을 설명하고자 하는 것이 이 중과장의 본의이다. 강한 신을 쓰고 약한 신을 버린다는 用强捨弱은 그 뜻이 너무나 명백하기 때문에 사실은 주석이 필요 없는 말이기도 하다. 한 장의 주제로서 매우 적절한 표현이다. 이 구절이 왜 천미에는 빠졌는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3) 적천수집요의 원주에 대한 해석

 

집요의 원주에 이르기를,(천미는 원문과 원주를 모두 포함한다. 그러나 위 ‘5. 본인의 해석’ 항에서 이를 해석했으므로 여기서는 생략한다.) “강함은 적은데 상대가 많은 것은 강함을 기뻐하므로 강함을 도와주는 것이 길하게 되고,(强寡而敵衆者 喜强而助强者吉) 강함은 많은데 상대가 적은 것은 상대를 싫어하므로 상대가 많은 것은 막혀서 흉하게 된다.(强衆而敵寡者 惡敵而敵衆者滯)”라고 주석하였다.

 

이상은 원주 작가의 본의에 부합되도록 애써서 번역한 것이다. 원주는 원문에 있는 두 개의 문장을 선후를 바꾸어 해석하였다. 좀 특이한 발상이라 하겠다.  

 

4) 전제군주시대의 피휘에 대하여

 

전제군주시대에는 피휘避諱라는 말이 있다. 피휘는 통상 말이나 글에서 왕이나 또는 존경하는 어른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 공경의 표현이라 하겠다. 청나라 제4대 황제 강희의 이름이 현엽玄燁인데 통상적인 글에서도 이 현玄자를 쓸 수가 없기 때문에 현玄자를 원元자로 바꾸어 쓴 것이다.

 

그러므로 청나라 시대의 문헌에 있는 원기元機나 원묘元妙는 모두 현기玄機나 현묘玄妙로 이해해야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조선 세종은 이러한 피휘의 폐단을 줄이기 위하여 왕자들의 이름을 벽자를 사용하거나 새로 만들어 썼다. 그렇고 보면 세종의 어진 성품을 알 수 있다.  

 

5) 원주를 원문과 상계하여 해석하다

 

“강함은(자기는) 적은데(약한데) 상대가 많은(강한) 것(强寡而敵衆者)은 강함을 기뻐하므로 강함을 도와주는 것이 길하게 되고,”라는 문장은 무슨 뜻인가? 强寡而敵衆者는 형세가 그 많음을 이루어줌에 있기(勢在成乎衆) 때문에 ‘(상대가) 강함을 기뻐하며’(喜强) 그러므로 또한 사주나 운세에서 ‘강함을(강한 상대를) 도와주는 것이 있으면 길하게 된다.’(助强者吉)라고 주석한 것이다. 이는 적중敵衆 곧 상대가 많음에 초점을 맞추어 해석한 것이다.

 

“강함은(자기는) 많은데(강한데) 상대가 적은(약한) 것(强衆而敵寡者)은 상대를 싫어하므로 상대가 많은(강한) 것은 막혀서 흉하게 된다.”라는 문장은 무슨 뜻인가? 强衆而敵寡者는 형세가 그 적음을(약한 상대를) 제거함에 있기(勢在去其寡) 때문에 ‘상대를 싫어하며’(惡敵) 그러므로 또한 사주나 운세에서 ‘상대가 많은(강한) 것은 막혀서 흉하게 된다.’(敵衆者滯)라고 주석한 것이다. 상대가 약할지라도(敵寡) 있는 그 자체를 싫어하는데 더구나 상대가 강하다면 다시 말할 것이 있겠는가? 여기에서도 적과敵寡 또는 적중敵衆 곧 상대가 적고 많음에 초점을 맞추어 해석한 것이다. 어떻든 위 ‘5. 본인의 해석’과 같이 그 뜻이 명백하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두 문장을 회통함에 있어서 크게 무리는 없다고 판단된다.  

 

6) 조강자와 적중자의 대응 구조가 아쉽다

 

이상으로 원주의 뜻을 나름대로 한번 정성껏 해석해 보았지만 두 문장의 전체 대의가 완벽하게 상통하도록 해석하기는 문장의 구조상 매우 어렵다. 원문 중에 강과와 적과 또는 강중과 적중 등은 모두 대구가 완벽하게 구성되어 있는데 조강자와 적중자의 대응 구조는 완벽하지 못하다. 이 때문에 해석상 문제가 많이 발생하는 것 같다.

 

만일 조강자助强者를 중시한다면 적중자敵衆者를 조적자助敵者로 바꾸어야 완벽하게 상응할 것이고, 적중자敵衆者를 중시한다면 조강자助强者 강중자强衆者로 바꾸어야 완벽하게 상응할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원주가 원문의 본의를 충실하게 반영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원주의 작가도 또한 강과와 강중의 강强자를 자기로 해석하지 않고 강약의 강자로 해석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기 때문이다.

 

 

8. 적천수천미의 임철초 선생의 해석

 

1) 중과는 강약을 의미하다

 

철초 선생은 적천수천미에서 이 중과를 이르기를, “중과의 설은 강약을 의미한다.(衆寡之說 强弱之意也)”라고 중과를 강약으로 분명하게 해석하였다. 이에 대한 시비는 있을 수 없다. 강중이적과强衆而敵寡와 강과이적중强寡而敵衆의 문장에서 핵심은 강과 적이 아니고 중과 과이다. 중과는 강약이란 설명이 바로 중과장의 핵심이다.

 

2) 강중이적과强衆而敵寡의 강强을 일주로 의론하다

 

연이어 이르기를, “반드시 일주와 사주를 양단으로 나누어 의론해야 한다. 가령 일주로 중과를 나누는 것은 예컨대 일주가 화이고 인묘월이나 사오월에 태어나면 관성이 수인데, 사주에 재성이 없고 도리어 토의 식상이 있거나, 가령 재성이 있어도 재성이 근기가 없으면 관성을 생할 수 없는 것이다. 이는 일주의 무리는 많고 상대 관성은 적게 되므로 형세는 그 관성을 다 제거함에 있으며, 세운도 마땅히 많음을 도와주고 적음을 억제해야 곧 길한 것이다.”라고 주석하였다.

 

위 문장 중에, “일주의 무리는 많고 상대 관성은 적게 되므로 형세는 그 관성을 다 제거함에 있다.”에 의거하면, 强衆而敵寡者 勢在去其寡의 ‘강중强衆’을 ‘일주의 무리는 많고(日柱之黨衆)’로 부연하여 강强자를 일주로 해석하였고, ‘상대 관성은 적게 되므로(敵官星之寡)’와 같이 적敵자를 관성으로 해석하였다. 그러므로 “반드시 일주와 사주를 양단으로 나누어 의론해야 한다.”라는 ’일주와 사주‘도 ’강强‘자에 대한 해석인 것은 명백하며, 또한 “형세는 그 관성을 다 제거함에 있다.(勢在盡去其官)”와 같이 ’관성‘도 ’적敵‘자에 대한 해석인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松栢 조흔] : 화살표(=>) 부분이 松栢의 해석입니다.

 

<시결> 抑强扶弱者常理. 用强捨弱者玄機. 强寡而敵衆者. 勢在成乎衆. 强衆而敵寡者. 勢在去其寡. 억강부약자상리. 용강사약자현기.강과이적중자. 세재성호중. 강중이적과자. 세재거기과.

  

=> 강자를 억제하고 약자를 부양하는 것은 보통의 이치이고, 강자를 쓰면서 약자를 버리는 것은 현기의(현묘하고 기밀함) 이치이다. 소수를 강화시켜서 다수에 대적하는 것은 모양새가(勢) 다수를 이루어주는데 있고,(다수를 조절해줌) 다수를 강화시켜서 소수를 대적하는 것은 모양새가(勢) 소수를 제거하는데 있다.(불순물 제거)

 

=> 强寡而敵衆者. 勢在成乎衆.은 정격의 용신법이고, 强衆而敵寡者. 勢在去其寡.은 종격의 용신법이다.@@@

 

强衆而敵寡의 강자를 일주로 해석하고 적자를 관성으로 해석한 사주의 사례가 무진생의 명조 곧 무진 을축 무술 신유이다. 이를 해석하면 아래와 같다.

 

辛 庚 己 戊 丁 丙 --- 辛 戊 乙 戊 : 乾命

未 午 巳 辰 卯 寅 --- 酉 戌 丑 辰

 

이 명조는 무술 양토가 중중하고, 을목은 뿌리가 없으며, 상관 신유금은 또 왕성하여 그 형세가 충분하고 상대 관성은 약하다. 이 때문에 처음 병인과 정묘의 대운으로 바뀌자마자 관성 을목이 득지得地하여 형모刑耗가 매우 많았고, 무진 대운에 천재일우의 기회를 만나 재물을 바치고 벼슬길에 나갔으며, 기사 대운에 이르기까지 20년 동안 토생금으로 신유 상관운이 왕성하여 좌이 벼슬을 거쳐서 금당에 올랐으나, 경오 신미의 대운에 이르러 오화와 미토 정화가 연이어 유금을 극하여 파손하므로 죽고 말았다.

 

=> 본명은 잡기월인 丑月生으로 辛金 상관이 투간했기로 잡기 상관격이다. 상관격은 兒又生兒아우생아하는 것이 수법으로 財貨재화로 순세하여야 한다. 본디 식상격은 정관이 투간하지 않아야 成格성격되고 정관이 투간하면 파격인데, 이는 비유하자면, 자유분방한 사람이 통제당하면 스스로를 주체하지 못하는 것과 같고, 상사 알레르기가 있어서 경찰관만 보면 울근불근하여 주먹을 휘두르는 사람은 주변에 경찰관이 없어야 하는데 하필 주변에 경찰관이 있어서 경찰관에게 주먹을 휘두르다 공무원 폭행죄로 감옥에 가는 것과 같아서 파격인 것이다.

 

=> 丙寅 丁卯대운은 丙丁火 인수가(교양) 개두돼 자유분방한 사람이 느닷없이 조신한 사람이 된 형국이고, 자유분방해서 법을 지키는데 서툰 사람이 寅卯木 정관의(준법) 뿌리를 얻으니 느닷없이 어색하게 법을 지킨다고 고생하는 형국이다. 주특기가 식상의 자유분방하고 부지런함인데, 관살운에 구속당하고 도식운에 활동성이 떨어지니 발전하기 어렵고, 자유분방하던 사람이 경찰관을 만나서 대판 싸우다 다치게 된다.

 

=> 본명은 적천수 순국장에 해당하는 명조로 아우생아격에(종아격) 해당하는 특별격으로 일반적인 종격에(종강격, 종재격, 종살격) 해당하는 명조가 아니다.@@@

 

3) 강중이적과强衆而敵寡의 강强을 사주로 의론하다

 

철초 선생은 연이어, “가령 사주로 중과를 나누는 것은 곧 사주의 강약을 구분하는 것이다. 그러하나 또한 일주와 더불어 부합해야 하고 배반하지 않는 것이어야 미묘하다. 가령 수가 관성인데 휴수되어 무기력하고, 토는 상관인데 당령하거나 시령을 얻으면 그 기세는 그 관성을 제거할 수 있으며, 세운도 또한 마땅히 관성을 억제하여야 아름답다. 일주는 화인데 또한 모름지기 통근하여 득기하면 곧 토를 생할 수 있으며, 혹은 목이 있어서 토를 극하면 곧 일주 화가 스스로 목을 인화하여 돌아가며 상생할 수 있는 것이니, 이른바 일주가 부합한다는 것이다.”라고 주석하였다.

 

이 3)항은 위의 2)항과 대동소이하다. 그러므로 자세한 해석은 생략한다. 이 3)항과 관련한 명조가 바로 무오생의 무오 임술 정묘 계묘의 명조이다. 해석은 아래와 같다.

 

己 戊 丁 丙 乙 甲 癸 --- 癸 丁 壬 戊 : 乾命

巳 辰 卯 寅 丑 子 亥 --- 卯 卯 戌 午

 

이 무토 상관이 당령하고, 인성 묘목도 함께 보이며, 임수와 계수 관살이 비록 투출하였으나 뿌리가 없으므로, 형세가 관살을 제거할 수 있다. 초년에 대운이 해자축 북방으로 나가므로, 임계 관성이 득세하여 한 가지 일도 이루지 못했다. 병인과 정묘의 대운에 화토를 생조하므로, 사업을 경영하여 수많은 재물을 모았고, 무진과 기사의 대운에 임계 관살을 모두 제거하므로, 한 자식이 과거에 합격하여 만년의 노경이 뛰어나게 높았다. 이 명조는 오화와 술토가 반합하여 화가 되고, 일지와 시지에서 묘목 인성을 만나므로, 일주 정화가 지극히 왕성하다. 묘목 인성을 용신으로 추단하여 쓰지 못하며, 또한 거관유살로 의론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 본명은 陰干從勢無情矣음간종세무정의에(음간은 자신의 세력인 엄마와 오빠와 아들을 좋아한다는 이론) 해당하는 명조이면서 濕木傷丁습목상정 명조이다.

 

=> 본명은 종격이 아니고, 水관살을 꺼리는 명조이면서 습목상정 이론을 가미해서 풀어야 하는 정격에 해당한다.@@@  

 

4) 강과이적중자 세재성호중의 문장을 해석하다

 

철초 선생은 연이어 强寡而敵衆者 勢在成乎衆의 문장을 해석하기를, “자기는 적은데 상대는 많음(强寡而敵衆, 중과장의 원문에는 强衆而敵寡라 기재되었는데 착오인 듯하여 수정하였다. 역자 주)이란 것은 가령 일주는 화인데 비록 당령하지 못했을지라도 도리어 뿌리가 있고, 왕성한 지지에 앉아 있으며, 관성은 수인데 비록 시령은 미치지 못했을지라도 도리어 재성이 있어서 생조하고, 혹은 재성이 당령하거나, 혹은 재성의 국을 이루면, 이 관성은 비록 적으나(此官星雖寡) 재성의 도움을 얻으므로 곧 강한 것이며,(得財星扶則强) 세운도 마땅히 적음을 도와주고 많음을 억제하면 길한 것이다.(歲運宜扶寡而抑衆者吉) 비록 재관을 들어서 의론했으나 그 나머지도 모두 이와 동일하게 의론하는 것이다.”라고 주석하였다.

 

위 2)항과 3)항에서는 “자기는 많은데 상대가 적은 것은 형세가 그 적음을 제거함에 있다.”라는 强衆而敵寡者 勢在去其寡의 문장을 해석하였다면, 이 4)항에서는 “자기는 적은데 상대가 많은 것은 형세가 그 많음을 이루어줌에 있다.”라는 强寡而敵衆者 勢在成乎衆의 문장을 해석하고 있다.

 

위 强衆而敵寡者 勢在去其寡의 문장에 대한 해석은 원문의 대의를 완벽하게 드러낸 것 같다. 그러나 아래 强寡而敵衆者 勢在成乎衆의 문장에 대한 해석은 그 대의가 명백하게 드러나지 못하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그 이유를 정확하게 알려면 셋째 계축생의 명조 곧 계축 임술 병오 경인의 해석을 함께 살펴보아야 한다.

 

丙 丁 戊 己 庚 辛 --- 庚 丙 壬 癸 : 乾命

辰 巳 午 未 申 酉 --- 寅 午 戌 丑

 

일주 병화가 9월 술월에 태어나서 일주가 본래 시령을 얻지 못했다. 그러나 일주가 오화 양인에 앉았고 인오술 화국을 이루었으니, 이를 일러서 강과强寡라 할 만하다.(爲之强寡) 연과 월의 임수와 계수는 진기이고, 계수 관성이 여기에 통근하였으며, 축토는 그 인오술 화국을 설기하고, 경금 재성이 임수와 계수를 생조하여, 관살 임수와 계수가 무리가 되므로,(壬癸爲衆也) 형세가 많음을 이루어줌에 있다.(勢在成乎衆) 이 때문에 신유와 경신의 대운으로 바뀌자마자 금생수로 임계수가 왕성하여 조상의 유업이 풍성하였고, 그 즐거움도 자연히 한결같았다. 한번 기미의 대운으로 바뀌자 화토가 함께 왕성하여 부모가 일시에 돌아가셨고, 무오 대운에 이르기까지 20년 동안 가업을 파손 당한데다 처자까지 모두 잃어버렸으며, 병진 대운에 이르러 외지로 유랑하다가 객사하고 말았다.

 

=> 본명은 월지 상관격에 일인격이 가미된 명조로 일인격으로 놓고 풀어야 하는 명조이다. 火양인살과 대적하는 水관살이 용신이고 金재화가 희신이고 木인수가 약신인 명조이다.

 

=> 본명은 종격이 아니고 일인격의 특수성이 가미된 정격이다.@@@ 

 

위에서 본인이 철초 선생의 “强寡而敵衆者 勢在成乎衆의 문장에 대한 해석은 그 대의가 명확하게 드러나지 못하고 있다.”라고 한 이유는 이 셋째 명조의 해석을 살펴보면 그대로 드러난다. 곧 철초 선생도 강과强寡를 해석함에 있어서 강자를 강약의 강자로 판단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특히 위 명조를 해설하는 가운데, “일주가 오화 양인에 앉았고 인오술 화국을 이루었으니, 이를 일러서 강과强寡라 할 만하다.(爲之强寡)”라는 강과에 주목하여야 할 것이다. 일주 병화가 술월에 태어나서 신약한데 다시 말하면 과寡한데 지지에서 인오술 화국을 이루어 일주를 생조하므로 과寡가 중衆이 된 것을 강과强寡라 말한 것이다. 이 강과를 해석하면 과寡를 강强하게 했다 또는 적음을 많게 했다는 뜻일 것이다.

 

强衆而敵寡者. 勢在去其寡.

强寡而敵衆者. 勢在成乎衆.

 

위 문장은 강중과 강과가 대응하고, 적과와 적중이 대응하며, 勢在去其寡와 勢在成乎衆이 완벽하게 서로 대응하는 구조를 갖고 있다. 그런데 철초 선생도 여기에서는 강중과 강과의 강强자를 해석함에 있어서 강약의 강자로 집착했기 때문에 勢在成乎衆을 勢在去其寡와 대응하는 구조로 해석하지 못하고 있다.

 

이 항의 强寡而敵衆者 勢在成乎衆의 명조는 위 强衆而敵寡者 勢在去其寡의 명조와 완벽히 상반되게 구성되어야 하고 또 상반되게 해석하여야 비로소 적천수 원문의 작가의 본의를 온전히 드러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명조는 위 명조와 전혀 상반되는 관계를 형성하지 못하고 있다.

 

더구나 일주 병화와 인오술 화국의 세력과 임수 계수의 관살이 축토의 여기와 경금을 합한 세력을 비교해보면 서로 대등하다고 판단할 수 있다. 철초 선생의 첫째와 둘째 명조와 그와 관련한 해석은 强衆而敵寡者 勢在去其寡의 원문과 완벽하게 부합하지만, 셋째 명조와 그와 관련한 주석은 强寡而敵衆者 勢在成乎衆의 원문과 전혀 부합하지 못하고 있다. 勢在成乎衆과는 거리가 매우 멀다.

 

이 때문에 이 철초 선생의 强寡而敵衆者 勢在成乎衆에 대한 주석은 서락오 선생을 위시하여 후대 역학자들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에 대한 대안으로 서락오 선생이 창안한 방책이 적 곧 상대가 일주나 사주에도 있을 수 있다는 가설이다. 그러나 철초 선생은 중과장을 해석하는 가운데 서락오 선생이나 종의명 선생처럼 적敵자를 중심 개념으로 도입하여 해석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는 않았다.

 

어떻든 위 셋째 명조를 사례로 들어가면서까지, “이를 일러서 강과强寡라 할 만하다.(爲之强寡)”라고 주석한 것을 보면, 철초 선생도 이 强寡而敵衆者의 구절에 얼마나 많이 노심초사하며 궁구했는가를 짐작해 볼 수 있다.

 

 

9. 적천수보주의 서락오 선생의 해석

 

1) 강중적과强衆敵寡와 강과적중强寡敵衆에 대하여

 

서락오 선생은 중과장에 대하여 그의 적천수보주에서 이르기를, “자기는 많고 상대는 적음(强衆敵寡)과 자기는 적고 상대는 많음(强寡敵衆)은 그 이치가 동일하다. 전국의 기세와 기상이 이미 이루어졌으면 다만 그 기세에 순응하여 행할 수 있을 뿐이다. 설령 하나나 두 개가 있어서 그 신을 거스르면 오로지 제거함이 있어야 아름다운 것이며, 이는 그 적음을 제거하면 곧 많음을 이루어주기 때문이다.”라고 주석하였다.

 

이 문장은 처음부터 ‘행할 수 있을 뿐이다.’까지는 전체 문장에 대한 해석으로서 다시 말하면 강중적과强衆敵寡와 강과적중强寡敵衆에 대한 해석으로서는 온당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설령’ 이하 ‘아름다운 것이며,’까지는 强衆而敵寡者 勢在去其寡의 문장을 잘 해석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마지막 구절 곧, “이는 그 적음을 제거하면 곧 많음을 이루어주기 때문이다.”라는 문장은 사족과 같아서 없는 것이 더 좋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제거하는 것’과 ‘많음을 이루어주는 것’은 한 명조에 있어서 동시에 발생할 수 있는 개념이 아니고, 각기 다른 명조 곧 强衆敵寡의 명조와 强寡敵衆의 명조에서 따로따로 발생하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2) 이 장에서 비로소 적敵을 일원과 사주의 개념으로 확장하다

 

적천수보주에서 연이어 이르기를, “이러한 부류의 격국은 바로 전국의 기세를 주로 하며 일원을 주로 하지 않는 것이다. 전국의 기세를 거스르는 자가 상대가 되는 것이니, 상대가 일원에 있으면 곧 종격이 되는 것이다. 상대가 사주에 있으면 곧 기신이니, 그 상대를 제거하면 곧 전국의 기상이 순수해지는 것이다.”라고 주석하였다.

 

철초 선생이 중과장의 첫머리에서 말한, “중과의 설은 강약을 의미한다. 반드시 일주와 사주를 양단으로 나누어 의론해야 한다.”라는 문장과 위 “이러한 부류의 격국은 바로 전국의 기세를 주로 하며 일원을 주로 하지 않는 것이다.”라는 문장은 일부는 부합되지만 일부는 정면으로 배치된다.

 

곧 ‘일주와 사주’ 특히 ‘사주’와 “이러한 부류의 격국은 바로 전국의 기세를 주로 하며”라는 문장은 그 의미가 상통하지만, ‘일주’와 “일원을 주로 하지 않는 것이다.”라는 문장은 그 의미가 상반된다.

 

또한 “전국의 기세를 거스르는 자가 상대가 되는 것이니,”라는 문장도 옳지 않고, “상대가 일원에 있으면 곧 종격이 되는 것이다.”라는 문장도 또한 옳지 않다. 왜냐하면 상대가 일원에 있거나 또는 상대가 사주에 있을 이유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해석은 모두 적천수 원문의 작가의 본의와는 천연의 차이가 있다.

 

특히 적 곧 상대가 일원 또는 사주에 있을 수도 있다는 개념은 서락오 선생의 독창적인 해석이다. 이를 종의명 선생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이는 서락오 선생과 종의명 선생이 모두 강자에 대한 개념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입증하며, 억지로 해석하다보니 상대를 일원과 사주에 확장하여 해석하는 지경에까지 이른 것 같다. 철초 선생은 적 곧 상대를 관성으로 한정하여 해석했을 뿐이다.

 

3) 일단 전제가 잘못되면 종문도 자연히 잘못될 수밖에 없다

 

적천수보주에서 연이어 이르기를, “다만 상대를 제거하고자 하면 반드시 사주에 그 기신을 제거하는 신이 있어야 하는데 극하는 관살이나 설기하는 식상이 이것이다. 만일 극하거나 설기하는 신이 없으면 우뚝 솟아 손상이 없으므로, 비록 그 기신을 제거하고자 하나 제거할 수 없는 것이다.”라고 주석하였다.

 

“만일 극하거나 설기하는 신이 없으면”의 전제조건은 이 중과장과 전혀 관련이 없다. 그러므로 ‘우뚝 솟아’ 이하의 문장도 모두 사족에 불과할 따름이다.

 

4) 중과장과 전혀 관련이 없는 사족에 불과하다

 

연이어 이르기를, “상대가 일주에 있으면 따를 수 있는 것과 따를 수 없는 것의 구별이 있고, 상대가 기신에 있으면 제거할 수 있음과 제거할 수 없음의 분별이 있는 것이다. 제거할 수 없으면 도리어 이를 사용해야 하는 것이니 예컨대 숭정황제의 명조이며, 이는 마지못하여 사용하는 것이다.”라고 주석하였다.

 

‘상대가 일주에 있으면’이란 전제 자체가 크게 잘못되었다. 그러므로 이하의 종문도 자연히 잘못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상대가 기신에 있으면’이란 전제는 정당하다. 또한 그렇지만 “제거할 수 있음과 제거할 수 없음의 분별이 있는 것이다.”라는 종문은 정당하다고 말할 수 없다. 만일 제거할 수 없다면 强衆而敵寡者 勢在去其寡와 상응하는 명조가 아닌 것이 명백하기 때문이며, 또한 숭정황제의 명조는 다른 격국으로 판단하는 것이 더 옳을 것이기 때문이다.

 

 

10. 현대파역적천수의 종의명 선생의 해석

 

1) 현대파역적천수는 적천수징의를 모본으로 삼았다

 

1997년 대만에서 출간된 종의명 선생의 현대파역적천수는 서락오 선생이 저술한 적천수징의를 모본으로 삼아 작성된 것이다. 종의명 선생은 그의 서문에서 밝힌 바와 같이 적천수의 모든 주석자 중에 임철초 선생과 서락오 선생을 쌍벽으로 드높이 추앙하고 있으며, 이 때문에 이 중과장에 대한 그의 해석도 서락오 선생의 견해를 그대로 답습하고 부연하는 차원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문단의 구성은 본문에 대한 [語釋]이 있고, 다음 [原註]와 원주에 대하여 간단하게 해석한 ‘鐘按’이 있으며, 그리고 그의 견해를 자세하게 밝힌 [破譯]으로 되어 있다. 이 종의명 선생의 견해를 함께 옮긴 것은 그의 해석에 특별한 점이 있어서가 아니고, 다만 중과장의 해석에 대한 변화과정을 음미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2) 强衆而敵寡者 勢在去其寡의 문장을 강중强衆의 입장에서 설명하다

 

어석에 이르기를, “팔자 중에 주체와 함께 상생 상조하는 오행의 역량은 매우 크고 수량도 매우 많아서 한 개체의 집단을 형성하며, 이러한 개체의 집단에 대항하는 오행이 다만 한두 개의 극도로 미약한 기력만 있을 때에는 반드시 전체 대국을 고려하고 기력이 미약한 대항하는 오행을 잡아내어 소제(극설)하여야 한다.”라고 주석하였다. 이 문단은 제목을 그대로 해설로 삼아도 될 듯하다.

 

3) 强寡而敵衆者 勢在成乎衆의 문장을 적중敵衆의 입장에서 설명하다

 

어석에서 연이어 이르기를, “위와 상반되는 것이다. 주체의 기력이 미약하고 대항하는 오행의 역량은 매우 크며 수량도 매우 많아서 한 개체의 강성한 반대 집단을 형성할 때에는 반드시 순종하여야 하며, 주체를 버리고 생조하는 반대 집단의 오행을 제거하여야 한다.”라고 주석하였다.

 

이 문단은 처음부터 ‘반드시 순종하여야 하며,’까지는 强寡而敵衆者 勢在成乎衆의 문장을 해석한 것으로 보인다. ‘주체를 버리고’ 이하 문장은 필요하지 않은 문장이다. 왜냐하면 일주가 순종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주체를 버릴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생조하는 반대 집단의 오행을 제거하여야 한다.”라고 한 주석은 본문의 위와 아래 문장을 섞어놓아서 매우 혼란스러울 뿐만 아니라 또한 이치에도 맞지 않는다.

 

4) 원주의 앞부분을 적천수집요에 의거하여 보완하다

 

원주에 대하여 종안鐘按에 이르기를, “적천수집요의 원문에 ‘강한 신을 억제하고 약한 신을 보조하는 것은 상리常理이고(抑强扶弱者常理) 강한 신을 쓰고 약한 신을 버리는 것은 현기玄機이다.(用强捨弱者元機)’라는 글이 있으며, 이하에서 다시 본서 원주에 기록된 문구가 연결되어 있다. 원주는 지극히 간결하여 초학자를 대응하여 인도하는 효과가 매우 적다.”라고 주석하였다.

 

적천수집요에는 있으나 원주에는 없는 抑强扶弱者常理와 用强捨弱者元機라는 문장을 보완하니 그 뜻이 더욱 밝게 드러난다. 원기元機를 현기玄機로 해석하는 점에 대해서는 위에서 언급했다.

 

5) 취강사약取强捨弱은 상리 이외의 특수한 법칙이다

 

연이어 파역에서 이르기를, “태강한 오행을 극설하고 태약한 오행을 생조하여 명국이 균형에 이르도록 하는 것은 보통 정격으로 통용되는 명리의 법칙이다. 다만 본장에 제출된 이 ‘강한 신을 취하고 약한 신을 버리는 것(取强捨弱)’은 강성한 세력의 집단에 순종하여 희신과 용신 구신 기신 등을 결정하는 현기로, - 상리 이외의 특수한 법칙인 것이다.

 

자기는 많고 상대는 적음(强衆敵寡)과 자기는 적고 상대는 많음(强寡敵衆)의 명리는 서로 동일한 것으로, 강중强衆과 적중敵衆이 모두 사주 중에 이미 형성된 기세와 형상의 한 가닥 강대한 집단이며, 다만 주체로서의 입장이 다름에 불과할 따름이다.”라고 주석하였다.

 

위의 문단은 먼저 정격의 상리인 사주의 일반법칙을 언급하고 나서 强衆而敵寡者 勢在去其寡의 문장을 주석한 것이다. 아래 문단은 중과장을 총괄하여 주석한 것이다. 강중과 적중의 강대한 집단이 주체로서의 입장이 서로 다르다는 표현은 참으로 옳다고 하겠다.

 

6) 强衆而敵寡者 勢在去其寡의 문장을 적敵 곧 상대의 입장에서 설명하다

 

다시 연이어 이르기를, “상대가 일간 이외의 관살이나 식상 재성에 있으면,

 

① 그 역량이 미약하여 일호도 의심이 없으며, 반드시 인성에 속하고 비겁이 주체의 집단이 되어 강성하다. 이러한 종류의 명국은 종왕격이 될 가능성이 매우 높으며, 이 때문에 그 적음을 제거해야 한다.”라고 주석하였다.

 

이 문단은 오로지 强衆而敵寡者 勢在去其寡의 문장만을 주석한 것이다. 주석하는 방법이 이 문단처럼 적敵 곧 상대를 중심으로 삼을 수도 있고, 이와 대치되는 강强 곧 자기를 중심으로 삼아 주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서락오 선생과 종의명 선생은 모두 전자만 취하고 후자는 배제하고 있다. 이는 강자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상대는 오로지 일간 이외의 관살이나 식상 재성에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위의 전제는 정당하고 이하 논리에도 전혀 허물이 없다.

 

7) 强寡而敵衆者 勢在成乎衆의 문장을 적敵 곧 상대의 입장에서 설명하다

 

연이어 이르기를, “② 그(적敵 곧 상대)의 역량이 강대하고 인성과 비겁의 역량이 미약하다고 한다면, 이는 기명종관살이나 종아 종재의 격국에 속하며, 이 때에는 모름지기 상대의 집단에 순종하여야 한다. 이 때문에 많음을 이루어주어야 하는 것이며, 이는 뒤집어서 말한 것이다.”라고 주석하였다.

 

이 문단은 전제조건이 옳고 그름을 상관할 것 없이 强寡而敵衆者 勢在成乎衆의 문장을 바로 주석하였다.

 

8) 强寡而敵衆者 勢在成乎衆의 문장을 상대 일간의 입장에서 설명하다

 

마지막으로 이르기를, “상대가 일간의 본신에 있는데, 만일 인성과 비겁이 일간과 함께 미약하고 그 정세와 형상이 상술한 ②항과 서로 동일하다면 이는 종격이다.”라고 주석하였다.

 

이 문단은 “상대가 일간의 본신에 있는데,”라는 전제조건이 크게 잘못되었다. 적敵 곧 상대가 일간이나 사주에 있을 수 있다는 전제조건은 서락오 선생의 창작물인데, 종의명 선생도 그 정사와 시비를 옳게 분별하지 못하고 여기에서 그대로 서락오 선생의 과오를 답습하고 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라 하겠다.

 

 

11. 결론, 그리고 원문 작가의 본의

 

1) 적천수를 쓴 한 지명인의 공적은 크고도 크다

 

나무가 크면 그늘도 크고, 사람이 크면 그 그늘도 또한 큰 법이다. 청나라 이전에 한 지명인知命人이 세상에 출현하여 평생 배우고 익힌 재주를 한껏 뽑아내어 이 한권의 책 적천수를 만들었다. 이 적천수는 불후의 명저로 후세에 평가받으며 현금에 명리학을 공부하는 모든 역학자들에게 표준서가 되고 있다.

 

적천수의 원문은 A4용지로 두장 정도의 분량에 불과하다. 밤하늘에 별을 가지고 시비하는 사람이 없는 것과 같이, 적천수 원문을 가지고 시비하는 역학자는 거의 없다. 우주와 만물의 주재자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별들을 수놓아 온 밤하늘을 장엄해 놓은 것과 같이, 적천수의 저자는 2,189개의 글자로 음양오행의 정수를 남음이 없이 밝혀서 명리의 바다에 펼쳐놓았다. 찬탄하고 길이 찬탄해야 옳을 것이다.

 

2) 용강사약用强捨弱은 중과장의 핵심이다

 

소암노인의 적천수집요에 의거하면 적천수의 원문이 “强衆而敵寡者 勢在去其寡 强寡而敵衆者 勢在成乎衆”이라는 문장이 아니고 “抑强扶弱者常理 用强捨弱者玄機”라는 문장이다. 곧 용강사약用强捨弱의 강약이 이 중과장의 핵심이다. 곧 “강한 신을 억제하고 약한 신을 보조하는 것은 상리常理이다.(抑强扶弱者常理)”라고 하여 사주의 일반법칙을 밝히고, 다음에 “강한 신을 쓰고 약한 신을 버리는 것은 현기玄機이다.(用强捨弱者玄機)”라고 하여 바로 이 중과장의 용강사약用强捨弱 곧 중과나 강약이 사주의 특수법칙에 해당함을 밝혔다.

 

3) 철초 선생의 저본은 적천수집요와 다른 듯하다

 

철초 선생이 적천수를 주석하며 고의로 적천수집요에 있는 원문을 삭제하지는 않았을 것이라 판단된다. 왜냐하면 요즈음 사람들은 원문의 내용을 자기 마음대로 바꾸는 경향이 매우 많지만 옛날사람들은 자의로 바꾸는 일은 거의 없으며, 설령 반드시 바꿔야 할 경우에도 그 이유를 반드시 주석에 명기하는 정도에서 그칠 따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철초 선생의 저본에는 적천수집요에 있는 원문이 없었다고 판단해야 옳을 것이며, 이를 감안하면 이 중과장만 가지고서 철초 선생의 주석에 대하여 크게 허물을 논해서는 안 될 것이다.

 

4) 强衆而敵寡者 勢在去其寡의 해석은 탁월하다

 

어떻든 철초 선생의 强寡而敵衆者 勢在成乎衆의 문장에 대한 주석은 좀 아쉬움이 남지만, 그러나 强衆而敵寡者 勢在去其寡의 문장을 강중强衆에서 일주와 사주로 분별하여 주석한 점은 탁월하다고 찬탄할 만하다. 또한 원주가 없었다면 임철초 선생의 전체 주석도 거의 완벽에 가깝지는 못했을 것이다. 원주의 작자와 임철초 선생의 공적도 길이 빛날 것이다.

 

또한 서락오 선생이 명리학에 끼친 공적은 매우 크고 높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이 중과장을 해석하는 방법으로 적敵 곧 상대를 일원이나 사주의 위치에까지 확장한 해석은 크게 잘못되었으며, 적천수 원문과 원주의 저자가 모두 성의백 유기라는 주장과 함께 커다란 오점으로 남을 것이다. 그러므로 새로운 주장을 함부로 내세우는 일은 크게 삼가야 할 것이다.

 

5) 간법看法보다 관력觀力이 중요하다

 

무슨 학문이든 첫째 창작이 가장 어렵고, 그 다음은 1차 주석이 어려우며, 이에 비하면 2차 3차의 주석은 그 어려움이 훨씬 더 줄어든다. 창작은 원문이 해당되고, 1차 주석은 원주가 해당되며, 2차 주석은 천미가 해당되고, 3차와 4차 주석은 보주와 파역 등이 이에 해당될 것이다.

 

그러나 임철초 선생의 천미의 주석이 가장 탁월하고 서락오 선생과 종의명 선생의 보주와 파역의 주석이 커다란 오점을 남긴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뒤에 나온 주석은 앞서 나온 주석보다 더욱 더 심화되고 향상되는 것이 기본상식인데, 적천수 중과장의 주석에서는 왜 이와 같은 기본상식이 깨어졌을까? 이는 보주를 쓴 서락오 선생의 간법看法보다 천미를 쓴 임철초 선생의 관력觀力이 훨씬 더 탁월했기 때문이다. 임철초 선생의 넓고 깊은 관력 곧 수행력에 감탄을 금하지 못한다.

 

6) 강희자전과 用强捨弱에 의거하여 해석하면 그 뜻이 명백하다.

 

强衆而敵寡者. 勢在去其寡.

强寡而敵衆者. 勢在成乎衆.

 

자기는 많은데 상대가 적은 것은 형세가 그 적음을 제거함에 있고,

자기는 적은데 상대가 많은 것은 형세가 그 많음을 이루어줌에 있다.

 

자기는 강한데 상대가 약한 것은 형세가 그 약함을 제거함에 있고,

자기는 약한데 상대가 강한 것은 형세가 그 강함을 이루어줌에 있다.

 

이상의 해석이 적천수 중과장에 대한 본인의 결론으로서의 해석이다. 강희자전에 의거하면 강强자를 ‘자시야自是也’라 주석했다. 또한 적천수집요의 원문 抑强扶弱者常理 用强捨弱者玄機라는 문장과 일철초 선생의 “중과의 설은 강약을 의미한다.(衆寡之說 强弱之意也)”라는 주석에 의거하면, 위의 해석과 같이 强衆而敵寡와 强寡而敵衆의 문장을 그 뜻이 지극히 명백하게 드러나도록 해석할 수 있다.

 

7) 적천수 작가의 원의는 무엇일까?

 

그렇다면 적천수의 작가는 왜 자기를 강强자를 써서 표현하였을까? 다시 말하면 왜 자기의 의미를 구태여 흔하고 흔한 강强자를 써서 표현함으로써 후세의 학자들에게 수많은 혼란을 초래하게 하였을까? 이는 적천수의 작가에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고 후세의 학자들에게 있다. 어떻든 본인은 아직 그 본의를 알지 못한다. 안목을 갖춘 강호제현께서 지남이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8) 결론 중에 결론

 

적천수천미의 본문에 의하면 위 7)항에서와 같은 의문이 여전히 남을 것이다. 그러나 적천수집요에 의하면 적천수의 본문이 “强衆而敵寡者 勢在去其寡 强寡而敵衆者 勢在成乎衆”이라는 문장에서 “抑强扶弱者常理 用强捨弱者玄機”라는 문장으로 바뀌며, 이로써 위 7)항의 의문은 원문의 작가가 아닌 원주의 작가로 한정하게 된다. 원문의 작가가 아니고 원주의 작가가 강자를 써서 적천수의 원문을 주석했다면 구태여 그 강强자를 쓴 원의를 밝히려고 애쓸 필요까지는 없다고 판단된다.

 

그렇지만 또한 적천수 원문의 범위를 ①“抑强扶弱者常理 用强捨弱者玄機”에서 ②“强衆而敵寡者 勢在去其寡 强寡而敵衆者 勢在成乎衆”까지 확장하고, 원주를 ③“强寡而敵衆者 喜强而助强者吉 强衆而敵寡者 惡敵而敵衆者滯”로 한정하고자 한다. 그 이유는 ②의 문장이 마치 한 사람이 작성한 것처럼 ①의 문장의 주제 곧 用强捨弱의 의미를 완벽하게 설명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문장의 구조도 완벽하게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며, 이에 반하여 ③의 문장은 마치 두 사람이 작성한 것처럼 用强捨弱의 의미도 제대로 드러내지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②의 문장과도 그 의미가 서로 연결되도록 완벽하게 해설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떻든 여기에서도 강자를 쓴 원문 작가의 원의는 여전히 숙제로 남는다. 원문의 범위를 확장하는 이것으로 마지막 결론을 삼고자 한다.

출처 : 조흔사주 원리학당 [사상 명리학]
글쓴이 : 松栢 조흔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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